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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흥미 Aug 15. 2023

치유의 시간

흥미회복기

이대론 안되겠다. 여행이라도 가보자.


날짜에 맞춰 제주행 티켓과 숙소를 알아보고, 일본가도 될 금액으로 제주를 향했다. 해외여행 경험이 많이 없던 나는 일본행은 왠지 겁도 나고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하루 24시간 생각회로를 돌리는 파워N이기도 하고..)


이번 여행은 왠지 모르게 소중하게 기억하고 싶었고, 짧은 제주에서의 기록을 남겨두었다.



#1. 떠나는 사람들


인천 2호선을 지나 서울역이 도착점인 공항철도 상행선. 그 곳에 캐리어를 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대부분 중간에 내려 김포공항으로 향한다.


모두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들.


아침 출근길에 신도림만 지나면, 아니, 1호선만 타고 있더라도 그야말로 여기가 서울이구나 싶다. 감정 없는 얼굴, 잔뜩 찡그린 표정, 무차별적으로 밀어대고 밀리는 통에 인상을 쓰거나 욕을 하는 사람들. (물론 그 욕 하는 사람 중에 나 또한 포함)


공항철도를 탑승해보면 저마다의 다른 사람이 모여있다. 사색에 잠겨 있는 사람, 전화로 바쁘게 업무 보고를 하는 사람, 사진을 찍는 사람, 여행 지도를 보는 사람. 이들이 모여 여유가 만들어지고 그 풍경을 보고 있자면 왠지 모르게 현실에서 해방된 느낌이 든다.


목돈을 마련해 벤츠를 사더라도 아침 출근길은 비슷할 테고, 서울에서의 아침 일상을 관둘 수는 없을 것 같다. 매번 여행을 가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으니 지금처럼 어떤 곳에서든 순간적인 여유를 찾는 시야를 훈련해봐야겠다. 작게나마.



#2. 서귀포항의 사람들

이번 짧은 여행은 쉼의 목적을 두었고 서귀포항에 숙소를 잡았다. 창문을 열면 어느 방향이든 바다 내음보다 비린 해산물과 술 냄새가 섞여 코를 찌른다. 숙소 근처를 걷다 보면 횟집이 대부분이라 술에 잔뜩 취한 중년 아저씨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돌아다닌다.


나는 술에 취한 아저씨들을 보면, 내가 어릴 적에 아버지가 하던 일이 연달아 잘 안 되고 한동안 술만 드시던 모습이 다시 떠올라 나도 모르게 부정적인 색안경이 써진다. 그래서 대놓고 코를 막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인상을 쓰고 걸어가며 무안을 준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세상 제일 행복한 사람들에게 나 하나의 색안경 그리고 무안이 뭐 대수일까. 타인의 시선, 행동보다 현재 본인들의 행복이 더 중요한 사람들. 


그저 오늘 하루의 노고를 해결하면 그게 전부인 사람들.


서귀포항의 사람들.



#3. 제주에서의 미션

누나들이 시간을 맞춰 제주로 왔다. 다른 상황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가장 역할을 하며 살다보니, 첫 남매 여행이 되기까지 34년이 걸렸다.


나 어릴 때, 특히 작은 누나랑은 눈만 마주치면 죽일 듯이 싸웠는데 이제는 척하면 척이다. 아무 말 안 해도 서로의 기분을 알고 아무 말 안 해도 서로에게 위로를 받는다.


제주 와서 나름 내가 아는 이곳저곳 소개해주고 사진 찍어주고 하는데 누나들도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니라는게 느껴졌다. 나보다 누나들인데 나는 왜 내가 나이 들어가는 만큼 누나들의 세월은 보지 못했을까. 아무쪼록 많은 추억을 안겨주고 보내야지.


막냇동생의 주말 미션.



#4. 치유의 숲

이번 제주 여행은 종일 걷거나 버스, 택시를 이용했는데 가장 좋았던 것은 택시 기사님들과의 대화였다. 지금 여행 중인지, 머무는 숙소가 어딘지, 대화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처럼 우리에게 이것저것 묻고는 숙소 근처 맛집과 여행지를 추천해주셨다. 그중 가장 좋았던 곳은 치유의 숲.


이 숲은 특히나 암 환자 혹은 오랜 시간 투병 중인 환자들이 많이 온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휠체어가 편하게 산책할 수 있는 숲길도 다양하게 조성되어 있다. 공항으로 향하던 우리는 기사님께 죄송한데 여기서 내릴 수 있냐고 묻고는 숲 입구에 내려 한참을 구경했다.


내려야 하는데, 남매끼리 여행 왔다고 신기해하던 기사님의 이런저런 이여야기 덕분에 요금 잔돈이 내 손에 올 때까지 거의 5분이 걸렸다. 내릴 때 기사님이 비행기 시간을 물어보더니 잔돈을 주며 말씀하셨다.


아직 시간 많으니 천천히 치유받고 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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