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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내댁 Feb 06. 2019

믹스커피에 대한 단상

20살 여름, 나는 믹스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마셔보긴 했지만, 하루의 고단함을 믹스커피로 위로받던 시기는 미국 이민생활을 시작하고부터였다. 나와 동생은 대학생과 중학생이었지만, 부모님의 나이는 이미 50대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노후 계획을 세울 나이에 이민을 결심한 부모님은 대단한 분들이셨다. 하지만 이민생활은 녹록지 않았고,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부모님과 등하교 픽업까지 필요한 중학생을 모두 케어해야 하는 맏이의 역할은 내게 너무 버거웠다.


오전 수업이 없는 날, 집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얼음에 믹스커피 두 봉지를 타서 tv를 켠다. 그 달달하고 씁쓸한 커피 한 모금하면서 숨을 돌린다. 이제 집을 나서면 오늘도 12시가 다 되어 돌아올 것을 생각하면 이 시간이 오늘의 마지막 여유시간이다. 대학생이 바빠봐야 얼마나 바쁘겠어 라고 하겠지만 난 정말이지 너무 바빴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동생을 픽업해서 집에 내려놓고 다시 레스토랑에 가서 일을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문 닫을 시간이다. 의자를 모두 테이블에 올려두고 청소하고 정산 마감까지 하고 나는 내차를 끌고 돌아온다. 집에 오면 그제야 내일까지 제출해야 할 과제를 시작한다. 밤과 영어와 사투를 벌이다 보면 동이 튼다.


그래서인지 2년간의 미국 생활을 돌이켜보면, 바쁜 일상에 아주 잠깐 커피를 마시며 숨을 돌리는 장면, 깜깜한 밤 레스토랑이 끝나면 혼자 운전하면서 오는 길에 들었던 음악들 이런 기억들이 전부다.


이렇게 빨리 귀국할 줄 알았으면 영어공부를 조금 더 열심히 했을 텐데. 삶에 치어 일상에 치어 여유 한번 부리지 못하다 온 것 같다. 짧은 이민생활로 인해 철도 일찍 들고, 많은 것을 배웠지만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아려온다.


한국에 와서도 믹스커피 사랑은 그대로 이어졌다. 역시 월급쟁이만이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일찍 깨달아버렸기에 4학년에 취업을 했다. 첫 직장에서는 매일 매 순간이 배움의 연속의 연속이었고, 두 번째, 세 번째 직장을 옮기면서 더욱 성숙해지고 바쁜 와중에도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연차가 되었다.


오전에 출근하면, 책상 정리를 하고 따뜻한 믹스커피를 한 잔 타서 자리로 돌아온다. 아직 팀원들이 출근 전이면 조용해서 더욱 좋지만, 누가 옆에 있다고 해서 이제는 개의치 않다.


집에서도 같은 브랜드의 커피, 같은 물 양을 넣어 마시지만 왠지 회사에서 마시는 커피가 더욱 달고 맛있다. 연일 칼로리와 당분이 높다고 기사들이 쏟아지지만, 술과 담배를 안 한다는 핑계로 커피 한 잔 정도는 즐겨도 되지 않나 싶다. 오늘도 커피 한 모금을 하고 이런 여유를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해야지 하면서도, 빨리 은퇴해서 몇 시간씩 커피타임을 누려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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