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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완 Sep 26. 2024

보살팬의 가르침

 보살 팬이라는 별명이 붙은 야구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국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의 팬들입니다. 그들에게 보살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는 팀 성적이 장기간 하위권에 머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늘 경기장에서 열성적인 응원을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프로야구는 다른 나라의 리그와 달리 응원문화가 유달리 발달해 있습니다. 응원단장이 마이크를 들고 관중의 호응을 유도하고, 치어리더는 MLB의 관심을 받더니 대만프로야구에도 진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글스 팬들은 8회가 시작되면 육성응원을 시작합니다. 오직 자신들의 목소리만으로 '최! 강! 한! 화'를 외치는 것입니다. 경기를 이기고 있건 큰 점수 차로 지고 있건 이글스 팬들은 8회만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 경기가 막 시작된 것처럼 '최강한화'를 외칩니다. 팀 성적으로 각종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가지고 있는 이글스 팬이 최강한화라고 외치면, 상대편 응원단에서는 '꼴찌한화'로 화답합니다. 그럼에도 이글스 팬들은 늘 씩씩하고 용감합니다.


 저는 삼성라이온즈 어린이 팬 출신입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당시부터 아버지와 함께 야구경기를 보기 시작했고, 지독히도 우승 운이 없었던 라이온즈가 2002년도에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을 때는 우리나라의 월드컵 4강 진출보다 더 기뻐했습니다. 야구를 좋아하는 아저씨 팬의 입장에서 이글스팬들의 열정은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라이온스는 우승 운이 없었지 늘 상위권이었습니다. 이글스의 마지막 우승은 무려 지난 세기인 1999년이고, 이후에도 꾸준히 하위권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인가?'라는 의문을 품은 채, 운명적으로 이글스팬인 아내 HJ와 결혼했습니다. 이제 이글스팬의 응원을 집에서 직관하게 된 것입니다. 십 년간의 결혼기간 동안 한화의 성적은 큰 변화가 없었지만, HJ와 이글스 팬들은 제 상식에서 이해할 수 없는 열정으로 8회만 되면 여전히 쉰 목소리로 '최강한화'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심상치 않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이글스의 인기가 연고지역인 충청권을 넘어 전국구로 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2024년 시즌 초, 7연승을 하며 팬들의 마음을 잠시 설레게 하던 이글스는 금세(?) 제 자리인 하위권으로 자연스럽게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팀 성적과 상관없이 이글스의 홈구장은 연일 매진이 이어졌고, 이글스가 원정팀으로 방문한 한 구단은 사상 최초로 3일 연속 매진을 기록했습니다. 원정팀인 이글스 팬들의 입장 덕분입니다. 성적이 늘 하위권인 프로 스포츠 구단이 연고지역을 중심으로 깊은 충성심을 가진 소수의 팬덤을 가진 경우는 있습니다. 넷플릭스 다큐 '죽어도 선더랜드'가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글스의 팬을 마니아나 소수 팬덤이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이글스는 전통의 인기구단인 트윈스나, 타이거즈와 견줘도 손색이 없습니다. 도대체 왜?


 KBO의 하위권 팀 승률은 4할 언저리입니다. 10번 싸워 4번을 이기기도 힘듭니다. 99년 우승 이후 20년 넘게 하위권을 유지하는 이글스 팬들도 질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알고 경기장으로 향하고, TV를 켭니다. 

 도대체 이글스 팬들은 왜 이럴까요? 이 정도면 사회현상이고 전문가의 분석이 필요합니다. 

며칠 전, 친구와 가볍게 술 한 잔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HJ는 또 이글스 경기를 보고 있었고, 이글스는 역시나 큰 점수 차로 지고 있었습니다. 승패가 결정 나 보였지만 HJ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은 이들은 TV속의 이글스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8회가 시작되자 그 유명한 육성응원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술이 취한 건지 갱년기에 취한 건지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솟구쳐 올랐습니다.  


 스포츠를 인생에 비유하는 것은 식상하지만 그 순간 저는 이글스 팬들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글스의 성적은 우리네 인생과 너무나 닮았습니다. 성공과 명예를 독차지하는 것은 오직 1등뿐입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아는 사람에게 깨지고, 지하철에서도 모르는 사람에게 밀리며, 때론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상처받기도 합니다. 이기는 것보다 지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글스의 성적과 우리네 삶의 성적이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이글스는 4할 언저리의 승률이지만 우리의 승률은 2할에 못 미칠 듯합니다. 

 혹시 이글스 팬들은 야구 경기를 응원하며 자신을 응원하는 것이 아닐까요? 저도 거실에 선 채로 TV를 향해 최강한화를 외쳤습니다. 그러자 기분이 너무나 좋아졌습니다. 이 좋은 걸 그동안 자기들끼리만 하고 있었던 건가요?


 이글스팬은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져도 내일이 있다는 것을. 설령 내일의 태양이 뜨지 않더라도 야간경기가 있다는 것을. 우승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야구를 즐기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는 자신들이 챔피언이라는 것을. 

 저는 보살팬들에게서 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행복야구가 팀 성적과 별개이듯이, 행복한 인생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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