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산을 오를까요?
저를 포함한 중년들은 여전히 단체로 산을 오르고, MZ들도 소수 또는 홀로 산행을 합니다.
평면적인 이유로는 사라졌던 식욕을 솟아나게 하고 사라져야 할 군살을 사라지게 하므로 건강에 좋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차피 다시 내려와야 하는, 육체적 고통이 따르는 일을 자발적으로 하는 데는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 산을 오르는 또는 고행의 길을 걷는 이유를 잘 설명해 주는 책 한 권이 있습니다.
2012년 출간된 <와일드>라는 책입니다. 미국 아마존 선정 인생 책 100에 선정되었으며, 한국을 포함한 21개국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토크쇼의 여왕이자 유명한 독서가인 오프라윈프리가 운영하는 ‘오프라 북클럽 2.0’애서 선정한 최고의 논픽션이며, 영화배우 리즈 위즈스푼은 이 책을 읽고 받은 강렬한 충격과 감명에 이끌려 영화를 직접 제작하고, 주인공으로 출연하기까지 합니다. 2014년 보스턴 영화제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좋은 영화이지만, 반드시 책을 먼저 읽어보기를 권해드립니다.
저의 인생 책이기도 한 ‘와일드’는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하였습니다. 아버지의 학대에서 겨우 벗어난 주인공에게 불행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이른 죽음과 남편과의 이혼을 겪은 후 찾아온 상실감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당시 그녀의 나이 겨우 26살이었습니다. 인생의 길은 너무 많이 남았고, 다시 걸어야 하지만 제 몸 하나 가누기도 버겁습니다. 이때 그녀는 운명적으로 PCT (Pacific Crest Trail)를 만나게 됩니다. 어쩌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산을 오르고 걷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전 세계 트래커들의 로망 중 하나인 PCT는 거리가 4,825KM에 이릅니다. 캐나다 국경에서 멕시코 국경까지 미국 국토를 종주해야 하는 길입니다. 당연히 걷기 좋은 오솔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려 9개의 산맥과 사막을 지나는 동안 사계절을 만나야 하고,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곰과 뱀을 비롯한 야생동물의 위협을 피해야 하며, 텐트와 음식을 배낭에 메고 걸어야 하는 그야말로 생과 사가 동시에 존재하는 길입니다.
저는 책을 읽는 동안 주인공과 함께 고통을 겪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녀의 발톱이 빠졌을 때는 제 발톱에 통증을, 물이 떨어졌을 때는 타는 갈증을, 수 십 킬로 안에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곳에서 밤을 보낼 때는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불가능이라고 여겨지던 이 길의 끝에 다다랐을 때는 함께 환희를 느꼈습니다. 제가 예민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잘 쓰인 좋은 책입니다.
단언컨대 걷기를 좋아하지 않거나 등산을 싫어하는 분들도 이 책을 읽고 나면 현관 앞에서 운동화를 신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은 이듬해, 자전거로 제주도를 종주하는 저 만의 모험 길에 올랐습니다. 당시 저도 와일드의 작가 셰릴 스트레이드처럼 인생의 고난을 지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PCT는 아니지만 270킬로에 이르는 제주도 환상 종주길 을 마치고 나니 허벅지와 마음에 작지만 단단한 근육이 생겼습니다.
산을 오르는 이유를 두 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 실재하는 육신의 고통으로 인해, 실체가 없는 상념을 잊게 하기 때문입니다.
쇼펜하우어는 하나의 고통은 열의 쾌락에 맞먹는 힘을 가졌다고 말했습니다. 산을 오르는 일은 육체적 고통이 따릅니다. 그래서 산 아래의 다채로운 걱정거리가 최소한 산을 오르는 동안은 잊힙니다. 등산은 인간이 거대하고 비경하다고 오착 했던 대사들을 초라하고, 새들한 소사로 만들어 버립니다.
둘째, 매진한 만큼의 대가를 정직하게 내어주며 성패와 무방하게 뜻대로 할 수 있는 드문 행위입니다.
와일드의 작가는 세상에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엄마의 죽음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맺어진 가족으로부터 받은 고통, 자신이 선택했던 가족과의 이혼, 그야말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의 일상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이 도덕책처럼 공평해 보이지 않을 때도 있고, 노력한 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할 때도 있으며, 무엇보다 살아가며 맺어진 허무한 관계와 생활이라는 현실 앞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러나 나의 의지만 있다면 산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으며, 내가 딱 한 발만 내딛으면 그만큼 정상은 가까워집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산을 오르는 일과 닮았습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혹독한 바람이 불다가도 슬며시 비치는 친절한 햇살에 살만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남보다 산을 빨리 오르기 위해 경쟁할 필요가 있을까요? 주변의 경치를 보며 산을 즐긴 이도, 앞사람의 신발만 보며 쫓기듯 산을 오른 이도 결국 같은 지점에 도달하게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