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무거나 괜찮다. 아무거나 다 맛있어. 너네 먹고 싶은 걸로 먹자.”
엄마는 외식을 앞두고 언제나 같은 대답이다. 아버지도 아무거나 괜찮다고 하시고, 우리가 메뉴를 제안할 때마다 고개를 저으셨다.
“딴 건 머 없나?”
그리고 결국 그날 본인이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곤 하셨다는 차이점이 있다. 매운 걸 못 먹는 엄마는 내가 매콤한 것이 먹고 싶다고 하면 무교동 낙지라도 먹자고 하실 분이다.
그날도 아무거나 좋다는 엄마를 모시고 남동생과 경양식 집을 찾았다. 마흔이 넘은 아들 둘과 엄마의 대화는 서로의 마음과 달리 사랑이 꽃피지는 못했다. 나는 불현듯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했다. 그러자 엄마는 씹고 있던 돈가스를 튀기며 이야기를 격정적으로 쏟아냈다. 놀랍게도 엄마는 산업 스파이로 활동한 이력이 있었다.
1948년생 남이는 중학생이 되고부터 복도에서 손을 들고 있는 날이 잦아졌다. 빈대떡 신사도 아닌데 벌을 받는 이유는 단 하나 월사금을 못 내서이다.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남이의 집이 원래부터 가난했던 건 아니다. 작은 불씨는 언제나 내부에서 일어난다. 남이의 둘째 삼촌이 밭에다 고구마 대신 대마를 몰래 심었고 당국에 적발되었다. 남이의 아버지는 동생을 구하기 위해 논밭을 팔았다. 얼마 후엔 또 다른 삼촌이 세 번째 탈영했다. 이때까진 팔 논이 있었으나, 이후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남이는 중학교 졸업 후, D 시에 살고 있던 이모 집으로 갔다.
“이모가 시집을 잘 가서 그 집이 방이 여러 개였어. 우선 집안 허드렛일을 하러 갔었지.”
호기심이 많던 남이는 버스 비도 아낄 요량으로 D 시의 이곳 저곳을 걸어 다녔다. 그리고 인생의 첫 꿈을 세운다. 남이는 미용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내가 어릴 때부터 청주이모 머리도 땋아주고, 재봉틀로 헌 옷에 주름도 넣어서 너희 이모 옷도 만들어 주고 그랬어. 나는 손으로 뭘 하는 게 재미도 있고 솜씨도 제법 있었다.”
남이는 미용사가 되면 동생 경희도 고생하는 엄마도, 자신을 가장 아끼는 외할머니 머리도 꼭 해주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도시의 남의 집살이는 어린 남이에게 심리적 부담감을 주었다. 소화가 안 되는 날이 이어지더니, 급기야 심하게 체하고, 일주일을 앓아 누웠다. 그 날 이후로 온몸에 기력이 다 빠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남이는 미용사의 꿈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고 건강을 회복하는데 꼬박 1년이 걸렸다.
남이 아버지의 친척 중 한 분이 서울에서 무역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전국 각지의 하청공장에서 가공된 물건이 서울에 모이면, 외국으로 수출을 했다. 주요 아이템은 가죽장갑과 알록달록 색칠되어있는 손가락 크기의 종이우산이었다.
남이 아버지도 하청공장을 운영하기로 했다. 문제는 기술자가 없었다. 남이 아버지는 첫째 딸을 J 시에 있는 공장에 취직시켰다.
“열심히 부지런히 장갑이랑 종이우산 만드는 기술을 배워오너라.”
그러나 딸1호는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고향으로 귀환했다.
며칠 후, 남이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산업스파이가 되기를 자청했다.
“아버지! 제가 언니보다 힘은 없지만, 손이랑 눈은 더 재빨라요. 저를 보내주세요.”
아버지는 몸은 약하지만 결연한 의지로 눈을 부릅뜬 딸2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남이 아버지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렇게 남이는 J 시의 수공업 공장에서 기술을 훔쳐내기 위해 위장 취업을 했다. 퇴근 후에도 남이는 남는 재료를 숙소로 가져와 이리 붙이고 저리 붙여보며 자기 생각을 가미해보았다. 그러자 공장에서 가르쳐 준 방법보다 훨씬 단단하게 만들고. 시간까지 줄일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게 되었다. 몸은 고되었지만, 살면서 가장 재미있는 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누구보다 빠른 눈과 깔끔한 솜씨, 사장의 마인드를 능가하는 의욕적인 자세는 모두의 눈에 띄었고, 남이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줄 반장의 임명이 되었다.
‘이제 떠날 날이 되었구나.’
그날로 남이는 짐을 싸서 숙소를 빠져 나와 야반도주를 했다. 이제 하산하여 강호를 평정할 때가 온 것이다. 세상아 기다려라! 남이가 달려간다.
남이가 배워온 기술로 아버지는 공장을 시작 할 수 있었고,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직원이 20명에 이르게 되었다. 남이는 현장을 진두지휘하며 때로는 작업을 마친 물건을 트럭에 싣고 서울로 납품을 가기도 했다. 문경새재 고갯길을 밤새 달려도 멀미는 고사하고 피곤한 줄도 몰랐다.
남이가 공장을 누비던 어느 날, 아버지의 폭탄선언이 떨어졌다.
“내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00네 장남이랑 결혼 날짜를 잡았다.”
남이는 외할머니를 붙들고 사정을 해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남이는 가출을 감행했지만 2박 3일 만에 아버지의 레이더 망에 걸렸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둘은 경주로 신혼여행을 떠났고, 시댁에서 신혼을 시작한 날 연탄가스를 마셨다. 그날부터 차만 타면 멀미가 시작되었고 남이는 웬만하면 기차를 탄다.
남이는 남편의 쥐꼬리만 한 월급봉투도 구경조차 못했다. 남편은 계모에게 월급봉투를 고스란히 가져다 주었다. 시어머니는 남이가 첫째를 임신했을 때 부지깽이로 배를 찌르며 그녀의 둔함을 탓하고 노동을 독려했다.
“임신한 게 무슨 대수냐? 어디서 유세야!
남이가 둘째를 임신하고 맞은 구정 전날이었다. 아직도 20대인 남이는 배추전이 너무 먹고 싶었다. 첫째를 임신했을 때는 입덧도 심하고 먹고 싶은 것도 없었는데, 둘째는 달랐다. 음식을 준비하는 내내 배추전이 눈에서 아른거리고, 머리 안이 배추 전 생각으로 꽉 찼다. 고기전도 아니고 배추 전 하나는 괜찮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막 시집온 손아래 동서가 느닷없이 배추 전을 집어 삼켰다..
“형님! 커.. 우리 이거…… 이거…… 하나만 먹어요. 제가 이거 다 먹고 어머니 오시나 망 볼게요. 형님도 커… 어서 드세요.”
잔뜩 겁먹은 동서는 그 큰 배추 전을 순식간에 삼켰다. 남이도 용기를 내어 배추 전을 입안으로 욱여 넣었다. 천상의 맛이었다. 이대로 먹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달콤함 뒤에는 언제나 쓰린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 인생의 법칙인 걸까? 동서가 급하게 부엌문을 열고 들어왔다.
“형님~! 지금 오고 있어요.”
남이는 채 씹지도 못한 식은 배추 전을 삼켰다. 그리고 급체로 인해 식은땀이 명절 음식의 기름처럼 흘렀지만, 버티고 버텼다. 마침내 모든 음식 준비를 마치고 남이는 쓰러졌다.
“지금이야 나도 가만히 안 있겠지. 그런데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렸고, 너희 할머니가 너무 무서웠다.”
며느리의 지독한 시집살이를 지켜보던 시아버지는 분가를 허락했다.
“아가! 내가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하다.”
남이가 가족과 함께 새집에 도착을 하니, 한겨울인데도 골방이었다고 한다. 시어머니는 연탄 30장을 보내주었고 부엌에는 냄비는 있는데 국자가 없었다. 그래도 이제 내 남편과 내 새끼들과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만은 여름 같았다.
누구보다 아끼고 옷 한 벌 사 입지 않아도 살림살이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한 달에 쌀 한 가마를 먹어 치우는 삼 남매를 보면 가슴이 미어졌다. 이런 결혼을 하라고 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남이의 몸도 마음도 무너진 어느 날 밤, 넋 나간 사람처럼 저수지로 향했다. 한밤의 저수지에는 낚시꾼들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낚시꾼의 그물에 잡힌 잉어 세 마리를 보았다. 남이는 자기를 기다릴 삼 남매가 떠올랐다. 집으로 다시 향하면서 남이는 마음을 더 굳게 먹고, 악착같이 살아남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시집온 지 17년 후, 서슬 퍼렇던 시어머니가 쓰러졌다.
몸을 가눌 수 없게 된 그의 곁을 마지막까지 지킨 건 남이었다. 남이는 찾는 이
하나 없는 그녀가, 자신과 함께 늙어가는 그녀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우리 엄마가 생불이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기도 했지만, 마지막까지 내 도리는 하
고 싶었다. 1년이 넘게 대소변을 받아 가며 그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마침내 그
가 한 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병원비를 남이에게 내놓는 대신, 전 재산을 교회에 헌금으로 내놓고 떠났다. 남이는 조금 서운했지만, 한편으로 홀가분했다. 그리고 사람이 많이 무서워졌다.
결혼한 지 45년이 지난 겨울.
남편은 먼저 세상을 떠났고, 잉어를 닮은 세 자식이 남이와 함께 장례식장을 지
켰다.
엄마의 이야기가 끝나자 내 치즈 돈까스의 치즈가 엄마의 세월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엄마는 틀니가 자꾸 빠져 말할 때도 먹을 때도 조금 불편하다고 말했다. 엄마와 더 많이 이야기 하고 맛있는 걸 먹기 위해서 빨리 틀니를 바꿔드려야겠다.
식당을 나오며 엄마는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한다.
“나도 젊었고, 너희들 자라는 거 보는 재미도 좋았다.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니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