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아버지가 복싱 경기를 볼 때마다 저러다 아버지가 TV 속으로 들어가는 건 아닐까 걱정을 하며 옆자리를 지켰다. 아버지는 한때 복싱선수를 꿈꾸었다고 한다. 얼마간의 트레이닝을 마친 아버지는 –아버지의 주장으로는 정식시합, 엄마의 추측에 의하면 그저 연습 스파링- 링 위에 호기롭게 올라섰고, 공이 울리자마자 상대의 강 펀치 한 방에 권투를 깔끔하게 포기했다고 한다.
무도 인은 배우고 익힌 그것을 링 밖에서 사사로이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러나, 링을 떠난 아버지는 잠시 익힌 권투로 동네에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친 것으로 엄마와 나는 유추한다.
7살이 되던 해의 크리스마스였다.
선물 상자 안에는 놀랍게도 권투 글러브가 들어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짐작만 하던 산타의 존재에 대해서 확신하게 되었다.
비폭력 평화주의자인 나는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권투글러브를 끼게 되었으며, 나의 스승은 당연히 한때 복싱 꿈 묘목이었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기본스텝과 원투 펀치 등을 서둘러 가르쳐 주었고, 성급히 스파링을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앉은 채로 나는 선 채로 부자지간의 스파링이 5년간 지속되었다.
기이한 스파링이 끝난 것은 내가 잭크가 아닌 콩 나무처럼 키가 자란 해였다. 나의 성장과 달리 아버지의 청춘이 지나자 아버지는 더 나의 펀치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안 되겠다. 이제 아프다. 우리 아들 다 컸다. 내가 늙은 건가?”
2년 동안 집에 처박혀 있던 글러브를 다시 꺼낸 건 아버지보다 어린 직장 상사가 타지에서 오고 나서이다.
아버지는 이제는 행정실로 불리는 중학교 서무과에서 근무했다. 그 시절에는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회의 시간에 재떨이가 비행하기도 했으며, 펜으로 문서를 작성하였고, 한 번에 두 개의 문서를 작성하기 위해 먹지를 깔고 글을 썼다고 한다. 아버지는 업무적인 실수를 한 후, 동네 어른이자 상사인 서무과장 앞에 무릎을 끓기도 했다고 한다. 그 모든 걸 참아냈지만, 새로운 서무과장은 최종학력이 대졸이며 아버지보다 2살 어린 타지 사람이었다.
어머니의 기억에 의하면 아버지는 새로운 서무과장과도 친하게 지내려고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 기억 한 편에는 아버지의 미묘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사건이 있다.
볕 좋은 일요일 오후 아버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먼지 낀 권투글러브를 광에서 꺼냈다.
“아들아! 이번에 너희 반에 새로 전학 온 성훈이 알지? 그 애 아빠가 새로운 서무과장이다. 오늘 그 집에 권투 하러 가자.”
나는 친구 집에 가서 만화책을 보거나, 함께 모여 축구를 하러 나가거나, 밥을 먹는 때도 있었지만, 권투를 하러 가는 경우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새로 부임한 서무과장의 집은 동네에 몇 안 되는 이층 양옥집이었다.
넓은 마당에는 조경이 잘된 나무들이 엄마가 탐내던 식기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나를 더욱 놀라게 만든 건 마당 한 쪽에 웅크리고 있던 검은 갈기를 가진 셰퍼드였다. 집마다 잡종 견을 키우던 시골에서 TV에서나 보던 셰퍼드를 실물로 본 건 처음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녀석에게 매료되었다.
아버지는 형식적인 안부 인사를 마치자 서둘러 두 아이에게 권투 글러브를 끼웠다. 하지만 성훈이는 내 스파링 상대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연약한 아이였다. 나는 성훈이를 상대로 펀치를 휘두르는 게 무도인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빛은 애절했다.
‘쳐라! 아들아! 그 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오늘 이 마당에서 마음껏 펼쳐라.’
종이 인형 같은 성훈이가 마당에 주저앉고 나서야, 아이들 장난을 가장한 어른들의 신경전이 끝났다.
이후로 나는 학교에서 성훈이의 적응을 돕기 위해 나섰고, 아버지는 더 이상의 권투 시합을 주선하지 않았다. 직장도 직장 밖도 낯선 타지에서 온 서무과장은 터줏대감인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는 키우던 셰퍼드가 새끼를 낳자 선뜻 한 마리를 우리 집으로 보냈고, 엄마와 우리 삼 남매는 넷째가 생긴 것 마냥 들떴고, 훗날 우리 집의 파수꾼이 되는 보비에게 애를 쏟았다.
보비가 온 이후로 우리 집에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아버지가 몇 번의 부침 끝에 다른 학교의 서무과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두 번째로 나는 주위의 모든 음식을 잠식시키며 또다시 열대 야자수처럼 자라기 시작했다. 2년 동안 30센티가 넘게 자라자 나는 모아이 석상처럼 또래보다 머리 하나가 더 놓이게 되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운동신경에 압도적인 신체 사이즈로 나는 작은 시의 각종 체육대회를 휩쓸었고, 설상가상으로 학교 성적까지 최상위권을 유지했다.
아버지는 집안 장손의 인생이 7막 8장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연극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김연아처럼 10대 나이에 세계를 주름잡은 것도 아니고 그저 시골에서 공부 좀 하는 덩치 큰 아이일 뿐이었는데도 말이다.
아버지는 누구를 만나던 키 큰 장남 자랑에 공을 들였고, 시간을 투자했다. 불우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과 다르게 자라나는 아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이 낙이었다. 기분이 좋아도, 몸이 힘들어도, 사는 게 힘에 부치면 술 한 잔 마시고 아들 자랑을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너무 빨리 찾아온 내 인생의 황금기는 금세 쇠퇴 되었다. 중학교 2학년이 되자 거짓말처럼 성장이 멈추었고, 평균 회귀의 법칙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학교 성적도 평범해졌다. 나는 더 이상 남들보다 크지도 학업성적이 월등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의 현재를 외면하고, 잠시나마 빛났던 과거를 회상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친척들의 명문대 입학과 대기업 취업 소식에 잠시나마 찬란했던 나의 과거로 맞섰다.
“우리 장남이 국민학교 때 어땠는지 알아? 서울대, 삼성 아주 우스웠어.”
아버지는 심지어 며느리에게도 아들의 과거를 시시때때로 늘어놓았고, 팔불출 같다는 어머니의 타박에도 무한 반복을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의 과거가 아닌 현재를 주변에 다시 알리게 된 것은 그로부터 30년이 훌쩍 지난 후였다.
“우리 아들이 작가 됐다! 내가 우리 장남은 뭐가 되도 될 줄 알았다.”
신춘문예를 통한 등단과 베스트셀러를 연이어 출간하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후자이지만, 아버지를 위해서는 전자가 적당할 것 같다. 동네에 플래카드 걸기에는 신춘문예 등단이 자랑하기가 용이할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친구들은 너무 빨리 세상을 등졌고, 친척들은 더 이상 잘 모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낙은 그렇게 날이 다르게 줄어만 갔다.
아버지는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는 말 뒤에 숨어서 장남인 나를 유독 자랑스러워했다. 아버지의 과장 섞인 자식 자랑이 못 견디게 싫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들을 수 없어 그립다.
“아버지 거기선 무슨 낙으로 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