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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Oct 14. 2021

가계 살림이 나아졌느냐고요?

  도시락을 싸기로 결심한 마음 깊은 곳엔 '돈'에 대한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나는 무척 지쳐있었다. 장거리 출퇴근도, 아이 돌보기도 나만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퇴근만 하면 꼼짝도 하기 싫은 시절들이 지속되었다. 집에서 아이와 종일 씨름을 한 남편도 내가 집에 도착하면 '자극적'인 것이 당긴다고 말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요리를 좋아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팔 걷어붙이고 집밥을 해 먹었을 텐데, 그럴 리 만무한 나는, '나도 오늘은 시켜먹고 싶다'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배달앱을 켜 주문을 해 먹곤 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외식은 주 3~4일이 넘을 때가 많았다. 한 번에  30,000원~40,000원씩 한 달에 최소 12번, 그러니까 최소 320,000원씩은 꼬박 외식비로 지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남편이 휴직을 하고 아이를 돌보고 있어, 내 월급이 생활비의 전부인 외벌이와 같은 상황이라 늘 생활비가 빠듯했다. 어떤 달엔 만기가 다 된 적금을 다시 재예치하지 못하고 카드값으로 빠져나간 적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월급날이 되어도 썩 신나는 기분이 들지 않았으며, 가끔은 내가 이렇게 애써서 일하는 데 왜 이렇게 남는 게 없는 걸까, 하고 울적해지곤 했다.


  그렇게 기분이 우울해질수록 자꾸 피자, 햄버거, 치킨, 족발 따위의 배달음식이, 혹은 김밥, 순대, 떡볶이 따위의 분식이 자주 먹고 싶었고, 그런 내 기분을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남편은 나의 퇴근 시간에 맞춰 주문을 해놓곤 했다. 벌써 일주일에 4번 이상시켜먹은 것을 알면서도 주문을 멈추지 못했던 것은, '서로 고생하는 걸' 알고 있기에, 단 돈 몇만 원에 잠시나마 스트레스를 풀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그런 현실 속에서 잘 버텨가고 있던 차에 운명적인 전환점이 찾아온 것이다. 한 푼이 아까운 내게 구내식당의 밥값이 유난히 비싸 보였던 것. 대충 한 달에 직장에서 점심비용으로 나가는 돈이 대략 100,000원. 구내식당에서 먹지 않고, 그 돈으로 재료를 사서 직접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니면 오히려 득이 될 것 같다는 계산이 섰다. 처음엔 나름의 행복 회로가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도시락을 싼다면 점심은 반드시 먹어야 하니까 요리를 필수적으로 할 테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냉장고에 남은 배달음식이 아니라 집밥과 집 반찬이 쌓여갈 것이 아닌가. 냉장고에 반찬을 그득히 넣어두면 외식을 하고 싶다가도 절로 마음이 변할 것이 아닌가.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배달앱에 접속하는 횟수도 줄고, 집밥을 먹게 될 것이라고, 그래서 돈도 절약하고 건강도 챙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저절로 줄어들 외식 비용, 그리고 한 달에 최소 100,000원 가까이 되는 돈이 모인다면, 가계 살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분명히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어떤 일이든 처음에 시작할 때에는 의욕이 넘치고, 잘하고 싶어 진다. 나 역시 그랬다. '건강도 챙기도, 돈도 아끼고! 일석 이조야!'라는 마음가짐은 목표지향적인 내 '기질'에 불을 붙였다. 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즉 목표가 생기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사람이다. '도시락을 싸기로 했다 - 돈도 아껴보기로 했다 - 매일 같이 집밥을 먹어야 한다. - 내가 결심했으니 해야지'라는 방향으로 생각이 흐르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요리책을 찾아보고, 유튜브를 보며 의욕적으로 집밥을 해 먹었다.


  매일 같이 새로운 메뉴를 고민했고, 반찬도 만들었다. 오늘은 카레, 내일은 짜장, 새우볶음밥, 무생채와 계란말이, 콩나물국, 콩나물무침, 참나물, 미나리 무침, 두부부침, 조림, 어묵볶음, 감자채 볶음 등 누가 보면 너무 쉬운 반찬들이지만 처음 하는 나로서는 하나하나가 도전인 요리들을 체크리스트 지우듯 처리했다. 목표한 반찬을 모두 만들다 보면 밤 11시를 훌쩍 넘긴 적도 간혹 있었지만,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전쟁같이 일을 하고 집에 온 날도 예외는 없었다. 종일 서 있어 다리가 퉁퉁 부은 날엔 압박 스타킹을 하고선 반찬을 만들었다. 딸이 먹을 반찬을 만들고, 다시 설거지를 하고 우리 반찬을 만들고, 도시락에 담고, 도시락을 싸고 하는 등의 먹고 싸는 일을 무한 반복했다. 정말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힘든 줄 모르고 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았다면 당연히 돈을 엄청 아꼈어야 했다. 흔히 베스트셀러에 오르내리는 저자들처럼 "도시락을 쌌더니 한 달에 월 40만 원씩은 저축할 수 있었다"거나, "도시락 덕분에 모인 돈으로 취미 생활을 하게 됐다"는 류의 성공담이 한 편 정도는 술술 나왔어야 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나는, 그 엄청난 성공담 속 주인공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렇게 도시락을 열심히 싸도, 아끼고 아낀다고 생활해도 생각만큼 돈이 절약되진 않았던 것이다.


 '이상하다. 이번 주는 한 번도 외식한 적이 없는데?'

 '어? 벌써 다 썼나?'

  하는 생각이 툭툭 튀어나왔다. 더군다나 월급날 전까지 통장 잔고는 언제나 아슬아슬했다.

  억울한 마음에 카드 사용내역을 뒤지고 뒤져봐도 과한 지출은 없었다. 외식의 횟수는 예상대로 줄었으며 (주 3~4회에서 주 1~2회로), 냉장고엔 갖가지 반찬들로 가득 찼다. 도시락 메뉴도 다채롭게 구성할수록 남편도 만족스러워했다. 분명 애초에 계획했던, 머릿속으로 충분히 그려왔던 행복 회로대로 열심히 살고 있는데 변화는 미미했다. 왜 그럴까, 왜 내가 노력하는 것에 비해, 변화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일까?


  답은 무심코 지나친, 별 이상 없다고 생각한 카드 사용내역 속에 찍힌, 무수히 많은 숫자들 속에 있었다.




  몇 년 만에 흥미로운 일거리를 찾은 나는 꽤 의욕적이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강한 호기심은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열정에 불을 붙였다. 몇 년 동안 뜻대로 되는 일 하나 없는 지루한 일상, 재미없는 직장, 그리고 반복되는 육아가 지겨웠던 내게 '도시락 싸기'는 그 모든 현실을 잊게 해주는 '마약'같은 취미였던 것이다. 늘 고여있는 일상과 다르게 도시락 싸기 만큼은 매일 같이 새로워지고 싶고, 발전하고, 성장하고 싶었다.


  농도 짙은 열망은 평범한 도시락을 거부하고 싶어 했다. 처음엔 단순하게 싸 가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새로운 것을 시도하게끔 나를 부추겼다. 매일 밥만 먹으면 지겹잖아, 좀 더 새로운 거 어때? 하며, 어제 만든 샌드위치에 재료를 좀 더 넣는 게 좋겠어, 샐러드엔 닭가슴살도 좀 넣어봐, 불고기 덮밥 같은 것도 좋잖아, 어제 먹은 오므라이스를 또 먹는다고? 내일은 새우볶음밥에 짜장 소스를 가져가 보지 그래? 라며, 점점 더 다양한 메뉴를, 다양한 재료를, 하루도 겹치지 않은 늘 새로운 메뉴를, 추천했다. 그러면 나는 덩달아 신이나 장을 보고 또 보고, 또 보았다.


  그게 화근이었다. 매일 같이 새로운 메뉴를 만들려고 하다 보니 마트 앱 장바구니엔 물건이 차고 넘쳤다. 사실 두부 한 모, 계란 한 판, 그리고 콩나물 한 봉지만 있으면 되는 것인데 굳이 다른 재료는 없나 둘러보게 됐다. 이것도 넣고, 저것도 넣고 나니 장바구니엔 이미 30개 가까운 물건들이 가득했고, 결제해야 할 금액은 20만 원에 육박했다. 보통 평소에 한 번 구매할 때 5~6만 원 정도로 구매하는 편이었는데, 도시락을 싸고부터는 장보는 비용이 최대 4배까지 늘었다. 물론 샀던 물건들을 전부 요리해서 먹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결과이긴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분명 한 번 먹고 버릴 텐데도 재료를 사게 됐다. 파스타 소스를 사니, 파스타 면이 필요했고, 그러면 새우와, 양송이버섯, 그리고 모차렐라 치즈 따위가 따라왔다. 분명 나를 위한, 우리를 위한 지출이긴 한데 어째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 온 것이다. 그러면서도 요리하는 즐거움에 취해 돈이 줄줄 새어나가고 있는 줄은 몰랐다.


  지나치게 열심히 하는 것도 문제였다. 늦은 밤까지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물에 젖은 손에 핸드크림 겨우 바르며 잠든 다음 날엔 꼭 피곤하고 힘들었다. 몸이 지치니 요리를 하기 싫었고, 자꾸 뭘 시켜먹고 싶었다. 밥에 반찬보다는 치킨에 맥주가, 어제 먹은 볶음밥을 데우기보다는 뜨끈한 감자탕 국물이 당기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4일 연속시키면서도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난 열심히 도시락도 싸고, 요리도 하니, 이 정도는 나를 위해 먹어도 돼!'라며 당당하게 '밀어서 결제하기'를 시전 했다. 그렇게 다시 일주일에 100,000원씩 외식을 하는 삶이 스멀스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너무 열심히 하는 바람에, 너무 힘들게까지 하면서도 힘든 줄을 몰랐던 바람에, 그 반작용으로 자꾸 돈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나서야, 아, 지금 우리 집 생활비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내가 잠깐 또 원래 목적이 뭐였는지 잊었다. 무엇 하나에 꽂히면 앞뒤 안 가리고 하는 성격,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무슨 일이 있어도 하는 성격이, 결국 또 하나의 문제를 만들어낸 것이다. 너무 진심이었던 내가 꼭 피하고 싶었던 '과소비'의 한가운데에 처한 이 아이러니한 현실, 벗어나고 싶었다. 벗어나야 했다.


  사고의 흐름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기로 했다. 너무 즐거워서 했던 일들이 때로는 알지도 못하는 순간에 지치고 힘들게 했다면, 잠시 쉬어도 된다. 또, 애초에 생각했던 행복 회로도 뜯어고쳤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 도시락을 싼다는 마음 자체를 지워버리고 도시락을 싸는 것만큼은 일이 아닌 취미로, 내가 즐거우려고 하는 것이라고 다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야 오래오래 도시락 생활자로 살 수 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어쩌다 한 번은 덕분에 돈도 모이는 일도 생길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난, 도시락에 담긴 내 진심, 열정, 욕망을 조금 덜어내기로 했다. 대신에 편안함, 즐거움, 여유로움을 넣기로 했다.



  가계 살림에 도움이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그렇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가끔은 과소비를 했으며, 가끔은 전보다 더 많이 외식을 했다. 100,000원이라는 식대를 아꼈지만, 그보다 더 많이 지출하게 된 적도 많다. 도시락 먹기 전과 후, 그렇게 크게 달라진 바는 없다.


  그러면, 도대체 석 달이란 시간 동안 무엇에 도움이 됐느냐? 고 묻는다면,

  대신에 아주 값진 것을 얻었다고 할 것이다. 우리 엄마가 내게 물려준 0.1g의 손맛 유전자를, 얻었다고.


  곰이 인간이 될 수 있는 석 달의 시간 동안, 나도 손맛이 조금은 생겼다. 이제 그 '손맛'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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