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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Mar 31. 2024

은수의 이야기 (3)

 걷고 싶었다. 


주삿바늘이 꽂혀 있던 자리가 욱신거려도, 오늘은 집에서 꼭 푹 쉬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어도 어쩐지 걷고만 싶었다. 일을 시작하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묘한 해방감, 그리고 함께 느껴지는 짜릿한 마음이 은수는 좋았다. 


병원 근처엔 걷기 좋은 곳이 많았다. 환자를 위한 것일까. 아득하게 조성된 산책로는 환자, 보호자, 의사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걷고, 뛰며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은수는 자연스럽게 그 속에 스며들고 싶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발걸음이 멈춘 것은 어느 놀이터 앞 벤치. 마침 앞에는 어린이집에서 막 하원한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친구와 함께 놀고 있었다. 미끄럼틀 위에서 꺄르륵, 한 번. 시소를 타며 까르르  한 번. 은수 눈에 별것 아니어 보이는데 아이들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따뜻한 바람은 볼을 스치며 지나갔다. 바람결에 실려온 낙엽이 은수의 손바닥 위에 살포시 떨어졌다. 후, 하고 불어 하늘로 올려 보내니 낙엽은 멀리, 멀리 날아가라는 은수의 바람과 다르게 고작 발 앞에서 툭, 하고 떨어졌다. 그 시선 끝에 목련 나무 한 그루가 위엄을 뽐내며 서 있었다.


하얗고 탐스러운 목련꽃. 

봄을 알리는 가장 첫 번째 꽃.

피었을 때는 너무 아름답지만 지고 나면 그 뒷모습이 어쩐지 보기 싫은 꽃.


가방 속에선 일정한 간격으로 진동음이 울렸다. 길게 다섯 번, 그리고 2분 있다가 다시 부웅-하고 한 번. 휴대폰을 꺼내 봐야 하는데 마음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네,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 


라고 시작한 대화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은수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치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처럼. 가을바람에 우후숙준 떨어지는 낙엽처럼. 그저 어떤 방향도 목적도 없이 휘둘리는 그 상황이 은수는 너무나 싫었다. 아니, 싫었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끔찍하리만큼 괴로웠다.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하나, 둘, 셋. 머릿속으로 시간을 더듬어 올라가 보고 싶었다. 

첫 만남이 어땠는지, 왜 이렇게 된 건지 곱씹는 것은 쉽지 않았다. 쓰리고 아픈 기억의 숲을 지나 마침내 기억한 것은 


목련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어느 날, 학부모 총회가 열리던 그날,

누구보다 밝고 다정한 미소로 내 앞에 앉아있던

반장 엄마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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