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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Apr 07. 2024

은수의 이야기 (5)

아주 식상하게 표현하자면 유진이는 만화 속에 등장하는 '반장'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지닌 아이였다. 단정한 옷차림, 긴 생머리, 그리고 밝은 미소를 곁들인 유쾌한 성격. 공부 역시 부족함도 넘침도 없었다. 첫 시험에서 반에서 1등을 하더니 줄곧 놓친 적이 없었다. 전교 10위 권 안에 항상 들어가면서도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아 선생님들에게도 예쁨을 받았다.



"쌤~ 어쩜 그 반 반장은 그렇게 알아서 척척 잘해?"

"선생님은 좋겠다. 유진이 보유반이라서!!"


우리 반 수업을 마치고 온 선생님들은 하나 같이 유진이 칭찬을 했다. 모둠 활동을 할 때 소외되는 아이가 생기면 다른 아이들은 제 것만 챙기는데 유진이는 그 친구까지 챙겨서 과제를 해낸다든가, 수업 중에 쓸데없는 이야기로 소란한 분위기가 되면 앞장서서 분위기를 잡아준다든가, 과학 실험 수업 후 뒷정리를 해야 할 때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정리를 해 놓는다든가 하는 미담은 늘 유진이를 따라다녔다. 사춘기를 겪는 중이라 늘 거칠고 반항적인 아이들 사이에서 유진이는 그야말로 꽃 같은 아이였다.


말할 것도 없이 아이들은 유진이를 좋아했다. 남자애들은 유진이를 좋아했고 여자애들은 유진이를 동경했다. 초등학교 5, 6학년 때 미국에서 살다와 유창한 영어발음은 친구들을 압도했고 대충 불러도 기본은 하는 노래 실력도 한 몫했다. 무엇보다도 체육을 할 때 유진이는 빛이 난다고, 자칭 유진이 팬클럽은 말하곤 했다. 긴 생머리의 청순한 이미지와 다르게 순식간에 돌변하는 눈빛은 유진이의 또 다른 매력이라며, 입에 침이 마르지 않도록 자랑을 하곤 했다.


유진이는 그야말로 우리 학교 2학년 아이들의 워너비였다.




처음 유진이가 있는 반의 담임이 됐을 때, 중1 때 담임을 맡았던 선생님이 은수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자기야. 올해 계 탔네? 유진이 있으니까 그 반은 걱정 없어. 걱정 마. 유진이가 알아서 잘 관리해 주니까. 그냥 믿고 맡기면 돼. 오케이?"


그래봤자 고작 열다섯 살의 아이에게 학급을 맡긴다?


은수는 어쩐지 그런 말들이, 그런 말에 둘러싸여 빈틈하나 보이지 않는 유진이가 불편했다. 솔직한 말로 반장 선거에 나오지 않았으면 했고 반장이 되지 않았으면 했다. 오히려 부반장이 된 현준이가 대하기는 훨씬 편했다. 남학생 특유의 서글서글함도 좋았지만 현준이랑 이야기를 하면 사람과 이야기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에 맡은 반에서 유난히 마음에 걸리는 아이가 있었다. 수업 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심지어 점심시간에도 존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아이. 조용히 제 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도서관에 가서 종일 시간을 보내고 오는 아이, 김지은. 1학년 담임 선생님은 지은이 이름을 듣자마자 고개를 저으며 난감해했다.


"지은이가 쌤 반이야? 고생하겠네. 난 걔 담임하면서 목소리 들어본 적 한 번도 없어. 부모님도 연락 잘 안 되시고. 얼마나 골치 아팠는지 몰라."


실은 은수도 겪긴 했다. 학기 초 상담을 할 때에 30분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버티는 바람에 필담으로 겨우 대화를 나누었던 지은이였다. 은수는 내심 유진이보다도 지은이가 더 마음에 쓰였다. 유진이는 알아서 잘할 아이라면 지은이는 알아서 잘 챙겨주고 싶은 아이였던 것이다.




은수의 걱정과 다르게 유진이가 반장이 되어 주도하는 학급은 정말 아름다웠다. 담임 선생님으로서 해 줄 것이 없을 정도로 알아서 척척, 다 해내 결과를 보여주었다. 학기 초에 걷어야만 하는 각종 통신문은 하루, 아니 이틀의 시간만 주면 유진이가 알아서 번호대로 걷어서 가져다주었다. 가끔 은수가 자리에 없으면 '선생님, 오늘도 힘내세요!'와 같은 메시지를 포스트잇에 적어 책상에 놓고 가기도 했다.


선생님들이 가장 골치 아파하는 학급회의 시간에도 유진이는 빛이 났다. 어쩐지 담임 선생님인 자신의 말보다 유진이의 말을 더 잘 들어주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쁠 정도로 아이들은 유진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힘을 느끼고 크게 받아들였다. 부반장 현준이는 그 옆에서 적절하게 분위기를 조절해 주는 분위기 메이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유진은 회의를 진행하면서 한 명의 의견도 무시하지 않았고 산으로 가려는 대화의 흐름을 원래대로 이끌어 가면서도 위트를 잃지 않았다. 은수도 저렇게까지 하진 못할 것 같은 그 수준에 감탄하고 있으면 유진이는 슬쩍 은수에게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쌤! 회의 저희가 열심히 잘해볼게요! 교무실 가 계셔도 돼요!"


난생처음 들어보는 말이었지만 내심 기분이 좋았다. 괜히 오버했나 싶을 정도로 학기 초의 불편한 마음이 걷히고 점점 익숙해졌다. 손 하나 댈 것 없는 반, 애들이 알아서 잘 해내는 반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면 가끔 작년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중1. 천둥벌거숭이 같은 아이들을 데리고 얼마나 많이 고생했던가. 가출한 아이, 무단 지각을 밥 먹듯 하는 아이, 학교 오기만 하면 선생님들과 싸우는 아이, 친구들에게 혐오 표현을 서슴지 않으며 자기가 피해당하는 것은 죽도록 못 참는 아이. 20명 중에 절반이 그런 아이들이었다. 덕분에 은수가 있던 1학년 교무실의 단골손님들은 은수네 반 아이들이었다.


그때에 비하면 천국, 아니 그 이상이었다. 은수는 지금의 평화가 좋았다. 교무실에서 들리는 고성은 은수네 반 아이들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수준 낮은 욕설과 거친 행동은 은수네 반에는 없었으므로. 그래서 은수는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익숙해지고 있었다.


아니, 길들여지고 있었다.



사진: UnsplashAndre Ben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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