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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아이들 25화

열두 살의 너에게 (2)

by 안녕

그러니까 우리 반에 또래보다 키도 크고 운동도 잘하는 남학생이 한 명 있었지. 그 아이의 이름은 원준. 초등학교 5학년. 서로 이성에 대한 관심이 생길 때 즈음이었던 그 시기에 원준이는 반에서 꽤나 돋보였던 친구였던 것 같아. 물론, 나에겐 아니었지만. 근데 어떻게 이름을 기억하느냐고? 사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원준이랑 같은 반, 짝꿍이었거든. 어쩌다 보니 맨 뒷자리로 배정받았는데 옆짝이 원준이었어. 당시 수업 시간에 딴짓하고 떠들면서 많이 친해졌었지. 착하고 순했던 기억이 있어. 배려도 잘해줬고. 그러다 보니 5학년 때 만나자마자 알겠더라고!


무튼! 그 원준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 에 모두의 관심이 쏠렸던 것 같아. 사실 내겐 아직도 초등학교 3학년 때 옆에서 서로 떠들고 장난치던 원준이 밖에 생각이 안 나는데 당시 우리 반 여자애들에게 원준이는 관심받고 싶은, 그런 워너비 같은 대상이었나 봐. 저 아이가 누굴 좋아할까? 그게 나였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마음 있잖아.


모두가 관심을 보이던 그때, 어떤 이유에서인지 네 이름이 들리기 시작했어. 사실 여기서부터는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 다만 그 당시 분위기로 추측하는 건데 아마도 원준이가 좋아하는 게 태경이 너라는 소문이 조금씩 흘러나왔던 것 같아. 나는 듣고 바로 수긍이 되더라. 넌, 내가 봐도 착하고 예뻤거든. 그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런데 다영이와 소미는 조금 달랐던 것 같아. 그 이야기를 듣더니 어느 순간부터 너를 조금씩 밀어내기 시작했던 것 같아. 그때 말릴걸. 아니 그때 박차고 나와서 너와 함께 지낼걸. 하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 '저러다가 그만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는데, 웬걸. 그 아이들은 조금 더 지독하게 널 괴롭혔던 것 같아.


넌 공부도 곧잘 했고, 착했고, 예뻤어. 당시 네가 짧은 단발머리를 하고 다녔던 것 같은데 네 특유의 밝은 에너지가 담긴 미소를 보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었거든.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되었던 것 같아. 다영이와 소미는 더 보란 듯이 널 무시했고, 괴롭혔어. 기껏해야 6명도 안 되는 모임 안에서 널 의도적으로 배제했지. 누구도 너와 놀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고.


너는 기억하고 있을까?


지금부터 내가 적는 이야기는, 너는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 기억 속에서 아예 사라져서 없는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학교 담벼락 아래에서 아이들이 널 둘러싸고 했던 행동들. 그리고 그때 나누었던 이야기들. 그리고, 주도적으로 괴롭혔던 아이들 외에도 어찌할 바 모르고 그 공간에서 어정쩡하게 지켜보기만 했던, 나까지 말이야.


그날 일이 나는 너무 생생해. 고작 열두 살이 겪기엔 너무 상처였을 것 같아서.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바보같이 지켜보며 시간이 흐르기만을 바란 내가 너무 한심해서. 그날은 5월이었던 것 같고 우리는 학교 담벼락에 모였고. 이유 없이 너를 괴롭혔어. 이유가 어디 있겠어. 또래보다 착하고, 예쁘고, 인기 많은 남자아이가 좋아한다는 거? 그게 어떻게 이유가 되겠어. 전부 핑계인거지.


넌, 그날도 변함없이 그저.......


그 이후로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어.

이후의 기억은 흐릿할 뿐이야. 다만, 어느 날 갑자기

담임 선생님께서 들어오시더니 네가 전학을 갔다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과, 그리고 네가 정말 거짓말처럼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 그것뿐이야.


당시엔 너무 어려서 네가 왜 전학을 갔을지, 네가 우리와 함께 지내면서 겪었을 아픔이 어땠을지 가늠하지 못했거든? 그런데 이제 이렇게 커서, 내가 선생님이 되고 나니까 고작 열두 살의 나이에 겪었던 네 아픔이 너무나도 사무치게 느껴지는 거야. 얼마나 힘들었을까. 괴로웠을까. 지옥 같았을까.


학교폭력은커녕 그저 조용히 학교만 다니면 된다는, 사고 치지 말라는, 친구들끼리 놀다 보면 싸우기도 하고 그러는 거 아니겠냐는, 그게 다 네 행실도 문제라는, 사회적 시선이 가득한 그 시절에 어리디 어린 태경이 네가 겪었을 마음의 고통을 내가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겠어.


그리고 얼마나 미웠을까. 말리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던 나 같은 아이들 말이야. 우리가 목소리를 내주면, 말려주면 달라졌을 수 있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마음으로 그저 방관했으니까. 맞아. 난 너무 성실한 방관자였거든.


그걸, 이십 대 중반이 되어서야 깨달았어.

아. 내가 진짜 잘못했구나.

내 두려움, 무심함 때문에 한 친구의 아픔을 외면했구나. 하고.


그래서 문득문득,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면,

그때 열두 살 때의 기억과 비슷한 일을 겪고 있는 아이들을 만날 때면 자꾸 네가 생각나.

어쩌면 너는 그때의 일을 모두 잊고, 혹은 치유하고 지금의 나보다 더 잘 지낼 수도 있어. 우리 나이즈음이면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아직은 자유로울 수 있고.


그런데 나는, 자꾸만 그날의 내가 부끄러워져서 한참을 속으로 울어.

난 그 해 단 한 번의 따돌림도 당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마음 편하지만은 않아.

내가 벗어남으로 인해서 누군가는 아주 심한, 괴롭힘을 당했다는 것을, 아니까.


태경아.

정말 미안했어.

어려서, 미숙해서, 두려워서, 그리고 갖가지 이유로 외면했던 지난날의 나를, 용서해 줄 수 있니.

아니, 용서해 주지 않아도 좋아. 어쩌면 용서를 받는 것은 너무나 쉽게 면죄부를 받는 것이니까. 나는 이 불편한 마음을 계속 잊지 않고 그때를 기억하며 아이들을 대할게. 나 같은, 너 같은 아이들을 보살피며 다영이나 소미 같은 아이들을 지도하면서. 그렇게 지낼게.


그러니 너는,

네가 지금 있는 자리에서 많이 많이 행복하게 지내줘.

그리고 그때보다 더 활짝 웃어줘.


그런데

내가 갑자기 이 이야기를 왜, 너에게 글로 전하는지 궁금하지 않니?


그건 말이야.

아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야.




사진: UnsplashChris Liver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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