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라보자 Aug 18. 2021

엄마, 난 아직 아이들을 보는 게 불편해

아이들을 마주하는 자세

일 년에 한 번 있는 부모님의 휴가라 고향에 내려갔다. 엄마를 모시고 드라이브 겸  다니시는 절에 계신 스님을 뵈러 가는 길이었다.


“9월 초에 OO이 돌잔치야. 그날 내려와서 엄마랑 아빠 태우고 돌잔치 장소로 가.”


엄마가 갑작스레 조카의 돌잔치 소식을 전달했다.


“걔는 왜 돌잔치를 두 번씩 하고 그래.”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나의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무슨 돌잔치를 두 번 했다고 그래. 9월에 한 번만 하는데. 이번에는 가족끼리 간단하게 할 거야.”

“아… 그렇지. 내가 헷갈렸어.”




이혼한 이후로 의도적으로 아이들을 피하는 버릇이 생겼다. 백일, 돌잔치는 물론, 지인들이 모여 노는 곳에서도 아이들이 있으면 가지 않곤 했다. 아이들을 제대로 못 보는 상황에서 비롯된 어긋난 마음인지 비록 이혼했을지라도 다른 사람들은 면접도 하면서 부모, 자식 간 좋은 추억도 만들면서 잘 지내는데 나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나오는 자격지심인지는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을 불편해했고, 그러한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지인들도 아이들이 많은 자리에는 일부러 나를 부르지 않게 되었다.


“엄마, 나는 아직 아이들을 보는 게 불편해.”


처음으로 엄마에게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들은 존재만으로 사람을 미소 짓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기에 나의 아이들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른 아이들을 마주하며 웃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내 마음을 더 이상 다치지 않게 하는 방법이자, 아빠의 부재를 느끼며 자랄 내 아이들에 대한 예의라고 여겼다.


나의 이혼 과정은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비록 이혼으로 얼룩져 좋은 남편은 아니었음에도 좋은 아빠이고 싶었던 나를 향한 상대방의 첫 대응은 면접 거부였다. 그래서 첫 소송 때부터 면접교섭 이행명령을 신청하여 아이들을 보고자 하였다. 소송 중에는 유리한 판결을 얻어야 했기에 이를 거부할 수 없었다. 하지만 1심이 끝남과 동시에, 상대방은 면접을 거부하였다. 그러한 과정이 2심에서도, 다른 재판에서도 반복되었다. 소송 자체도 힘든 과정인데, 아이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황은 이혼 소송의 힘겨움은 배가되었다.



작년 재산분할 소송 때였다. 담당 판사가 양육자가 원하는 조건을 맞춰주고 아이들을 정기적으로 만나시는게 어떻게냐고 조정을 요청했다.


4년에 걸친 소송기간 동안 쌓인 피로감, 그에 비례하는 그리움들 앞에서 금전적인 부분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판사가 제안한 조정안에 당장이고 동의할 수 있었지만, 상대방의 법원 결정을 손바닥 뒤집는 성향이 못 미더워 망설여졌다.


이 조정안에 동의하는 순간, 소송은 끝이 나고, 또다시 면접교섭을 거부하였을 때 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없었다. 그래서 몇 번이고 면접에 관한 부분을 확인하고 상대방의 대답도 듣고 조정안에 동의했다. 심지어 양육비 인상 부분 시기까지 미리 정해 앞으로 생길 수 있는 분쟁조차도 방지하였다.


그렇게 조정으로 길었던 이혼 소송을 마무리하고 돌아온 첫 면접일 며칠 전, 오랜만에 설레는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일정을 문의하였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면접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법원에 전화하여 판사와의 통화를 요청했지만, 담당 공무원은 판사와 연결하여 줄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판사가 조정안을 제시했고 그 안에 서로 동의했으면 판사도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니냐고, 상대방이 조정안을 무시하는데 취소해 달라고 우기기도 했지만, 조정안에 서명하는 순간 끝난 것이라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담당 변호사의 사무장에게 전화하여 이러한 상황을 말하고 어떻게 해야 되냐고 묻자, 면접교섭 이행명령 밖에 없는데 그 효력에 대해 잘 아시지 않냐는 대답만 돌아왔다.


고작해야 100만원 이하의 벌금과 그것마저도 안내면 그만이라는 부연 설명과 함께.




이때 나는 아이들에 관해 그나마 열려있던 문을 완전히 닫아버렸던 것 같다. 그래야 내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를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이후 일 년이란 시간 동안 첫째 조카와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고 둘째 조카가 생기며 아이들을 마주하는 빈도도 많아져서 조금 나아졌나 싶어 졌는데 아닌가 보다.


아직 아이들에 관해서 마음의 평화는 찾지 못한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환상과 현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