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라보자 Jan 19. 2022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

초단편소설

“여보! 나 승진했어!”


정자가 전화를 받자마자 영철의 몹시 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승진 대상이 아니라고 진즉에 포기했잖아.”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승진 발표 문서가 올라왔길래… 아는 사람들 이름 있나 확인해 보려고… ”


예상 못한 일이었는지 영철은 몹시 흥분한 목소리로 횡설수설했다.


“축하해. 여보네 회사 윗분들이 여보를 좋게 봤나 보다. 그러니 이렇게 깜짝 승진을 하지.”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여기 나 없으면 안 돌아가. 하하하.”


정자의 축하에 영철은 더욱 신나 목소리를 한층 높였다.


“여보! 애들 데리고 나와. 오늘 내가 소갈비 쏜다.”

“회사 사람들이랑 회식 안 해도 괜찮아? 승진턱 내야지.”

“오늘 금요일이잖아. 이런 날 쏘면 쏘고도 욕먹어. 월요일에 사면돼.”

“얘들아. 아빠랑 밥 먹으러 가자. 아빠가 갈비 사준대.”


영철은 아이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통화를 마쳤다.




예상치 못한 희소식과 오랜만에 가족들과 맛있는 식사를 함께하는 즐거움에 영철은 평소보다 술을 더 들이켰다.


“올해부터 내 인생이 풀리려나보다.”

“그런가 봐. 그동안 고생했어.”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니 집에 가서 한 잔 더 할까?”

“괜찮겠어? 술 많이 마신 것 같은데.”

“괜찮아. 집에서 마시는데. 마시다 힘들면 자면 되지. 자. 얘들아 우리 편의점에서 먹을 것 좀 더 사가자.”


영철은 아이들의 손을 잡으며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술과 간단히 먹을 안주를 고르고 아이들이 먹을 것을 고르는 사이 편의점 한편에 놓여있는 로또용지가 눈에 들어왔다.


행운이 두 번 이어지지 말란 법도 없지


오늘 날짜와 자신의 생일을 조합하여 마킹을 한 로또를 구매한 영철은 정자에게 용지를 보이며 말했다.


“이게 우리에게 두 번째 행운을 물어다 줄 거야. 기대하시라.”




지난 금요일 몇 달만에 과음을 해서인지 영철은 주말 내내 숙취의 포로가 되어 요양하는 신세였다.

휴식을 취해서인지 컨디션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고, 오늘부터 이어질 승진턱 명분의 술자리에서 거뜬할 것 같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지난 몇 년간 이렇게 상쾌하게 아침 인사를 했던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환한 웃음을 지으며 사무실 사람들을 쳐다봤다.

그러나 책상에 앉아있는 다른 직원들은 뭐라고 꼬집어 표현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영철을 향해 고개를 움직였다.


아침부터 표정이 왜 이래 다들


활기찬 월요일에 어울리지 않는 얼굴을 한 그들을 이해 못 하겠다는 영철은 가방을 책상에 놓고 부장님 책상으로 향했다.


“야! 인사부는 일을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내가 20년 근무하면서 이런 경우는 또 처음 본다.”

“죄송합니다. 부장님. 신입직원이 사번을 잘못 입력하는 바람에…….”

“이게 신입 핑계로 돌릴 일이야?”


박 부장은 평소처럼 앞에 앉아있는 부하직원을 먹이 사냥하듯 코너로 몰아가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고개를 갸웃하던 영철은 박 부장과 눈이 마주쳤다.


“최 차장! 들어와 봐.”

“안녕하십니까. 부장님.”

“안녕이고 나발이고 여기 앉아봐. 야 강 팀장! 네가 최 차장한테 설명해.”

“네… 알겠습니다.”


강 팀장은 잔뜩 주눅 든 채 대답했다.


“최 차장님. 사실 말이죠… 정말 죄송한데…”


강 팀장은 일의 경과에 대해 최대한 미안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승진자 명단을 작성하면서 101132 사번의 채영철 차장을 입력해야 하는데 맨 앞의 숫자를 잘못 입력해 001132의 최영철 차장이 들어간 것이었다.

강 팀장의 해명을 들은 너무도 어이없는 실수에 화가 나 의자를 뒤로 밀치며 일어나며 따지려는 순간,


“강 팀장. 너 설명 다했으니 너네 부서로 돌아가. 그런데 나 이 일 그냥은 안 넘어가. 그리 알고 있어.”

“부장님. 이대로 강 팀장을 가라 하시는 게 어딨습니까. 저는 아무 말도 못 했는데요.”

“앉아 있어. 너는 빨리 가고.”


영철을 자리에 앉힌 박 부장은 틀에 박힌 위로를 건넸다.

회사 생활하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다.

인사부에서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너도 네가 승진 대상자 아닌 것은 알고 있지 않았냐.

똥 밟았다 생각하고 털어버리자.


박 부장의 어이없는 위로가 전혀 공감되지 않은 영철은 언성을 높여 불만을 표했지만, 더 큰 목소리로 윽박지르는 상사의 기세에 눌려 고개를 숙이고 그곳을 나왔다.




옥상에 올라와 바람을 쑀지만 답답한 가슴은 후련해지지 않았다.

몇 년 전 끊었던 담배가 모처럼 생각나 회사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담배를 사고 나오려는데, 한쪽 벽에 적혀있는 지난주 로또 1등 당첨번호가 보이는 것이었다.


어… 가만… 저 번호…


며칠 전 집 앞의 편의점에서 조합했던 그 번호다.

로또 1등이라니.

실감이 나지 않아 동행 복권 홈페이지에 들어가 판매점과 당첨금액을 검색했다.

1등이 1명인데 당첨 복권 판매점이 영철이 구매했던 곳이었다.

당첨금은 무려 130억 원이었다.


“출근 잘했어?”


정자의 인사에 답할 여유도 없는 영철은 바로 용건을 말했다.


“여보. 로또 종이 어딨어?”

“당신이 갖고 있겠지.”

“무슨 소리야. 계산하고 당신 줬잖아. 기억 안 나?”

“아… 그때 영수증이랑 같이….”

“그래. 그 거 어딨어?”

“버린 것 같은데.”

“뭐라고? 그게 얼마 짜리인데?”


정자는 영수증이랑 같이 있어서 쓰레기인 줄 알았다고 했다. 영철은 빨리 가서 찾아보라 말하며 길 가로 나와 곧바로 택시를 탔다.


“찾았어?”

“어제 쓰레기 버렸잖아. 이미 수거해 갔어.”

“그게 얼마짜리인데 버려!”


화가 난 영철은 정자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럼 당신이 챙기지. 왜 나한테 화를 내고 그래!”


갑작스러운 영철의 격한 표현에 같이 화를 낸 정자를 아랑곳하지 않고 영철은 그대로 환경센터로 갔다.


“저기요. 어제 버린 쓰레기에 중요한 물건이 있어요.”

“어디서 오셨는데요?”

“구로구요.”

“구로구 차는 들어온 지 한참 됐는데 저쪽으로 가보세요.”


담당자가 가리킨 방향으로 뛰어가며 소리쳤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쓰레기 반입장의 사람들이 영철을 쳐다봤다.


“쓰레기 봉지에 소중한 물건이 있어요. 찾아야 해요.”

“이미 늦었어요. 파쇄 시작된 지 한참 지났어요.”

“안돼요. 안 돼. 멈춰요.”


모여 있는 직원들을 헤치며 영철은 기계를 멈추려 했다.


“이 사람이! 지금 뭐 하는 거야?”


사람들은 영철을 기계에서 떼어내며 말렸다.


“당신 저 파쇄기 안 보여? 소중한 물건이 뭐든 이미 다 부서졌어.”


직원의 말처럼 커다란 파쇄기는 한 번에 수 십 개의 쓰레기봉투를 잘잘이 분해하고 있었다. 그 모양이 마치 130억 원이 100분의 1, 1,000분의 1, 10,000의 1… 기하급수적으로 나누어지는 것 같아 하릴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삶에 예고도 없이 찾아온 커다란 기회들이 이토록 허무하게 사라질 줄 몰랐다.



영철의 행운이 가루가 되어 날아가는 순간, 정자는 패물함을 열어 안에 있던 동그라미가 그려진 6개의 숫자를 보고 있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일장춘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