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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보자 Jan 16. 2022

일장춘몽

초단편소설

“어제  BTS 오빠들 봤어?”

“완전 대박. 더 빠져버렸잖아.”

“내가 다 뿌듯하다. 우리 오빠들.”


“어린것들.”


아이돌에 대한 팬 부심이 넘치는 교실의 공기에 이질감이 잔뜩 묻은 한 마디가 던져졌다.


“아 또 유지현. 뭣도 모르면 가만히 있어.”

“이것들아. 너네 들이 아무리 너네 오빠들 좋아한다고 해도 그 오빠들은 너네 일도 몰라.”

“오빠들이 왜 몰라. 우리가 얼마나 활동을 열심히 하는데.”

“됐다. 나 잘래. 쌤 오면 깨워줘.”


더 이상의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은 지현은 후드를 뒤집어 쓰고 책상에 엎드렸다.




5교시 시작 종이 올리고 교실문이 열렸다.

옆에 앉은 선아가 지현을 깨웠다.


“차렷. 경례.”


“안녕하세요.”


“자자. 수업에 앞서 옆에 계신 선생님을 소개한다. 오늘부터 한 달 동안 한문 수업을 함께할 교생 선생님이다. 교생 선생님은 우리 학교가 처음이니 너네들 선생님 말 잘 듣고, 모르는  글자 있으면 선생님에게 물어보고. 그럼 선생님 소개 부탁해요.”


새로 온 교생의 소개가 시작됨과 동시에 교생을 제외한 온 세상이 흑백으로 변하면서 지현의 시간은 멈춰버렸다.


저 사람... 설마...


 


지현이 아홉 살 때, 외가 친척들과 모여 강가로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지현은 아빠가 사준 플라멩코 보트를 사촌들에게 자랑하였고, 부러움의 시선을 받았다.


“언니. 나 한 번만 태워줘.”


“싫어. 나만 탈 거야.”


“누나, 그러면 얘 말고 나 태워주라.”


“싫어. 너도 어려서 안돼.”


지현은 보채는 사촌 동생들을 약 올리며 보트를 들고 강가로 뛰어갔다.


“여기까지는 못 오지? 메롱.”


어느 정도 따돌렸다 싶어 이제는 보트를 타고 본격적으로 동생들을 놀리기로 했다.

목 부분을 잡고 등 위로 올라가기 위해 점프를 하려는 순간,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았다.

겁에 질린 지현은 이성을 잃고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엄마! 언니가 이상해.”


밖에서 심통 섞인 표정으로 지현을 바라보던 사촌 중 한 명이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들은 지현의 아빠는 강 쪽을 바라보더니 뛰어갔다.

아이가 위험에 쳐했다는 생각에 무작정 헤엄쳐 지현을 안았다.


“지현아, 아빠가 왔어. 이제 괜찮아.”


아빠가 와서 자신을 안아줬음에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은 지현은 계속 발버둥을 쳤다.


“괜찮아. 괜찮아. 지현아.”


아빠는 지현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계속되는 몸부림 탓에  안은 채로 달랠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격했던 자그마한 아이의 저항에 아빠도 예상외의 부침을 느끼자 튜브를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이나마 힘이 빠진 지현을 한 팔로 안고 한 팔로는 튜브를 향해 나아갔다.


“지현아, 여기 올라가. 이제 괜찮아. 안 무서워.”


아빠는 딸을 튜브 위로 올리려 했지만, 튜브를 본 지현은 다시 놀란 마음에 아빠의 어깨 위로 올라가 머리를 끌어안았다.


아빠의 몸이 위아래로 움직였고, 더욱 당황한 지현은 그만큼 세게 끌어안았다.


“어떻게. 이러다 둘 다 큰 일 나겠어.”


강 밖에 있는 사람들이 어찌할 바 모르고 발만 구르고 있을 때 한 남자가 그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빠른 속도로 다가와 뒤에서 지현을 안았고, 아빠에게는 튜브를 밀어줬다.

구사일생으로 땅 위로 올라온 지현은 놀란 마음에 계속 울었고, 어른들은 그 남자에게 연신 감사인사를 했다.

남자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답례 인사를 했다.


“꼬마 아가씨가 아주 겁이 없네. 조심히 재밌게 놀아.”


남자는 울음의 끝자락에 다다른 지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의 일행이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물놀이 사고는 정리되었고, 친척 모임 중 생긴 에피소드로 마무리되었지만, 지현에게는 그날의 일이 커다란 의미로 자리 잡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 남자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줬다는 것은 알 수 있었고, 그 상황이 동화 속의 왕자가 위험에 빠진 공주를 구해준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서인지 자라면서 가끔 그때의 남자가 떠올랐다.

정확하게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현만의 왕자님에 대한 이미지는 뼈가 단단해지고 살이 붙듯 더욱 견고해졌다.

그 교생 선생님을 본 순간 지현은 알 수 있었다.

내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

나의 왕자님이란 것을.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운명인가 보다.

잠시 멈췄던 지현의 동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매점에서 돌아오는 길, 슬기를 만났다.


“야. 너네 쌤 어떠냐?”

“갑자기?”

“다 여자인데 너네 반 쌤만 남자잖아. 그래서 궁금해서.”

“교생쌤이 다 똑같지. 어차피 한 달만 있다가 갈 사람들인데.”


슬기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이야기하듯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너네 반 애들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응, 그건 매점에서 잘 사줘서 그래. 그러니 울 반 애들이 좋아하지. 이거 그 쌤이 사준 거야. 너네 쌤은 이런 거 안 사줘?”


슬기는 약 올리는 표정으로 손 안의 초코빵을 흔들어 보였다.


“그런 거 먹으니 살만 찌지.”


그런 슬기가 거슬린 지현은 괜한 심통을 부리며 자기 반으로 돌아가 이번 주 한문 수업 준비를 했다.




한문 선생의 이름은 장준대로 까만 피부에 거구의 몸집이라 학생들은 장독대라고 불렀다.

왠지 음흉한 눈빛으로 학생들을 쳐다보는 것 같아 대부분  그의 수업을 꺼려했고, 일주일에 한 번뿐인 그 수업조차도 너무 많다고 여겼다. 

그러나 지현은 한문 수업이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한 달 밖에 머무르지 않는 교생 선생님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네 번 뿐이고, 벌써 반이 지난 것이다.

이제 겨우 두 번째 보는데.


“앗!”

“뒤에 뭐야?”


수업 중인 장독대가 소리 나온 곳을 가르치며 경고했다.


“샤프를 떨어뜨려서요. 죄송합니다.”


지현은 장독대를 향해 고개를 숙여 말했다. 그리고서는 선아를 향해


“왜 찔러? 미쳤어?”

“어딜 그렇게 쳐다봐. 너 나 아니었으면 장독대한테 걸렸어.”

“내가 어딜 봤다고.”

“날 본 것 같지는 않고. 왜 자꾸 옆만 보고 그래. 너 때문에 내가 수업에 집중을 할 수가 없잖아.”

“미친년. 지가 언제부터 공부했다고.”


“유지현!!”


두 소녀의 속닥거림이 다시 한번 거슬린 장독대가 사자후를 토해냈다.


“네.”

“오늘따라 유독 눈에 잘 띄네. 좋은 일 있어? 네들끼리만 알지 말고 나한테 도 좀 알려주지.”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죄송할 짓은 하면 안 되지. 이왕 눈에 띄었으니 나와서 45페이지 칠판에 적어.”

“네……”


교생 선생님 앞에서 두 번이나 지적받은 것도 부끄러운데 벌을 받게 되는 상황이 무척이나 창피했다.

그것도 악필 중의 악필이며 한자도 잘 모르는데, 칠판에다가 한자를 적는 것은 너무도 가혹한 벌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교생 선생님 앞에서 두 번 연속 지적을 받은 것이 몹시 창피했다.




“왜 찔렀어?”


수업이 끝나자마자 지현은 선아에게 따져 물었다.


“네가 정신 못 차리니까. 해성이 본 것은 아닐 테고, 설마 해성이 옆에 앉은 교생쌤 본거야?”

“무슨 소리야. 내가 교생쌤을 왜 봐.”


선아에게 속마음을 들킨 지현은 정색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와. 얘 좀 보소. 진짜인가 보네. 얘들아! 유지현이…”


선아가 두 손을 입으로 모아 큰 소리로 말하려고 하자 지현은 얼른 그 입을 막았다.


“너 미친 거야?”

“진짜네. 너 세상 시크한 척 살더니 왜 그래.”

“그게 아니고…”


지현은 선아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말했다.


“그때 그 남자인 줄 어떻게 알아? 너 완전 어렸을 때고 물에 빠져서 정신도 없었을 거 아냐.”

“느낌이 있어. 여지껏 내가 떠올렸던. 그래서 쌤을 첨 보고 알 수 있었어.”

“그럼 물어봐. 혹시 몇 년 전에 물에 빠진 초딩 구해준 적 있냐고. 그럼 더 고민할 것도 없잖아.”

“갑자기 다가가서 그런 거 물어보면 이상하잖아. 뭔가 자연스럽지 않아.”

“뭘 어쩌자는 거야.”


선아는 처음에는 지현의 이야기가 신기했지만, 이도 저도 아닌 행동에 곧 답답해졌다.


“나도 모르겠다. 휴.”

“아. 나 좋은 생각이 났어.”

“뭔데?”

“뒷자리에 자리가 4개잖아. 너, 나, 해성이, 빈자리. 그 빈자리에 교생쌤들이 앉고.”

“그렇지.”

“한문 시간에만 내가 해성이 옆에 앉을게. 그럼 너, 빈자리, 해성이, 나 이렇게 되잖아. 그럼 교생쌤이 네 옆에 앉겠지. 이보다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어때?”

“와. 너 보기보다 머리가 좋은데.”

“내가 자리 옮겨주니까 이따가 떡볶이에 튀김 쏴라.”

기발한 계획을 세워 만족감에 빠진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희희거렸다.



3주 차 한문 수업시간이 되었다.


“굿럭.”


선아는 지현을 보며 엄지를 세운 후 해성의 옆자리로 이동했다.

전 날 지현은 고민 끝에 편지를 썼다.

교생 선생님이 자신의 왕자님이 맞다면 그동안 품어온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든 전달하고 싶었다.

서랍에 편지를 고이 두고 앞을 바라봤다.

문이 열리면서 장독대가 길을 터주고 왕자님이 들어왔다.


오늘 드디어 왕자님과 다시 만나게 되는구나.

꿈같은 순간이었다.


교탁에 책을 놓은 장독대가 학생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자, 오늘은 교생 선생님이 수업을 진행한다.”


달콤한 꿈을 깨버린 장독대는 지현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지현은 서랍 속의 편지를 저도 모르게 꽉 쥐었고, 선아와 해성은 그런 지현을 보며 당황한 표정으로 웃음을 참기 위해 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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