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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보자 Mar 01. 2023

그럼에도 너는 여전하구나

이혼 소송은 처음이라 2

집을 나왔을 때는 더 이상 한 공간에 머물지 않아서 좋다는 생각에 숨이라도 돌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걱정되었다. 언제 분출될지 예상할 수 없는 그 사람의 절제되지 않은 감정이 혹여나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진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둘이 함께 있음으로 벌어지는 부모의 잦은 싸움과 혹여나 극단적인 끝맺음을 마주치게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라는 비겁하면서도 나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불편한 감정을 덮었다.




우리의 불화 원인 중 가장 큰 원인은 수입에 비해 큰 씀씀이로 파생되는 일들이었다. 직장인 3년 차인 외벌이의 월급으로 주택담보대출 원리금과, 성인 2명과 아이 2명에게 들어가는 여러 가지 명목들의 생활비 등을 부담하고 나면 남는 여유자금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당연히 남들처럼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자해서 재테크를 성공적으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계좌의 잔액이 바닥나지 않으면 내 입장에서는 선방한 것이라 생각했기에 현재 상황에 대해서는 체념 섞인 이해가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나와 같은 이해가 부족했다. 항상 신혼 때부터 뭔가를 사곤 했었다. 홈쇼핑을 보다가 필요할 것 같아서, 인터넷 쇼핑을 하다가 저렴한 것 같아서, 누군가의 추천을 받았는데 꼭 갖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등의 명목으로 옷, 신발, 화장품을 샀다. 그렇게 산 물건들을 잘 사용했으면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었을 텐데 그중의 반은 택도 뜯지 않은 채로 붙박이장, 신발장으로 들어갔다.


“나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지금 당장 입지도 않을 옷과 구두는 왜 사는 거야?”


“나중에 복직하면 입을라고 미리 산 거야.”


“너 복직하려면 2년 넘게 남았잖아. 그게 말이 돼?”


“이쁜 건 싸게 팔 때 사야 해. 그게 현명한 거야.”


납득되지 않는 이유를 내놓으며 자신의 쇼핑을 당연시하는 당당함에 놀랐고, 시간이 더욱 지난 후에 복직할 곳도 없었으면서 틈만 나면 애 키우면 복직할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뻔뻔함에 크게 놀랐다. 훗날 그 사람의 거짓말이 들통났고 가족들이 대신하여 나에게 사과하며 이해와 아량을 바랐을 때, 잠시나마 패션과 미용에 대한 소비가 주춤했지만 눌렸던 용수철이 더 높이 튀어 오르듯 그동안 사지 못했던 물건들이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와 방 한 구석의 공간을 차지했다. 




집을 나오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월요일이었다. 회사에 출근한 후 미리 써 놓은 메일 한 통을 그 사람에게 보냈다.


이대로 함께 살 수 없다. 당분간 떨어져 있는 것이 서로에게 좋겠다. 별거를 시작하게 됐으니 이번 달부터 양육비를 보내주겠다. 그리고 네가 갖고 있는 내 카드는 정지시킬 생각이다. 환절기라 아이들이 병원에 갈 수 도 있으니 당분간은 살려놓겠다.


메일을 보내자 별거의 시작을 준비하는 과정이 마무리된 기분이 들었고, 잠시 밖에 나가 씁쓸함과 후련함을 날려버린 뒤 자리에 앉아 평소처럼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30분이 흘렀을 때 하나의 문자가 날아왔다.


‘AA카드 0*2*승인 1,000,000원 일시불 OO치과’


카드 승인 내역을 보는 순간 이거 내 가족카드인데 뭐지라는 생각에 당혹감이 몰려왔지만 OO치과는 내가 살던 곳에 위치한 동네치과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유치도 다 자리잡지 못한 아이들이 치과에서 100만 원 상당의 치료를 받을 게 있나 아니면 카드가 도난당했나 라는 불안한 생각이 연이어 일어나 바로 전화를 걸었다. 알 수 없는 결제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다.


“제 카드가 도난된 것 같은데 방금 그 치과에서 승인됐어요. 취소 좀 부탁드릴게요.”


“네? 잠시만요. 손님! 잠시만요!”


수화기 너머의 또 다른 당황한 목소리가 누군가를 불러 세웠고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씨 아세요? 전화 주신 분 부인이시라는데요.”


“네? 아 부인이라고 하기에는…”


어쩌다 통화하게 된 치과의 직원에게 나와 그 직원 앞에 서 있는 사람의 관계가 무엇이며, 조금 전에 승인된 내역의 부당함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난데, 나 임플란트 치료했어. 그런 줄 알아.”


갑자기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는 100만 원의 용도에 대해 시원하게 통보를 한 후 전화를 끊어버렸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너는 여전하구나


아까의 당혹스러운 감정은 한순간에 허무한 감정으로 치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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