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오후 네 시만 되면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 두 시간 동안 물음에 단답형 대답만 하고 차 마시다 가는 앞집 사람. 기묘한 행위, 무례한 말투, 상식을 뛰어넘는 막무가내 고집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한두 번도 아닌 루틴이 되어버린 잃어버린 두 시간은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은퇴 후 평화를 꿈꾸던 부부의 위기
존경받는 교수 정인(오달수)은 은퇴를 앞두고 전원의 한적한 새집에 아내 현숙(장영남)과 이사 가는 날부터 시작한다. 열심히 달려온 세월의 보상처럼 느껴지는 아늑한 집은 부부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제2의 인생을 반기는 듯했다. 자식이 없는 부부는 딸처럼 가까운 제자 소정(민도희)이 가끔 찾아오는 일을 기쁨으로 여기며 편안한 노후 생활을 보내려고 이곳에 내려왔다.
인사도 할 겸 앞 집에 산다는 의사 육남(김홍파)을 찾아갔지만 집에 없는 듯하여 안부 편지를 보낸 게 화근이었다. 육남은 그날부터 오후 네시만 되면 부부의 집에 들어와 막무가내로 시간을 강탈하기 시작했고 부부의 일상은 지옥이 되어갔다.
영화는 강박적인 남자를 강제로 접대할 수밖에 없는 정인과 현숙의 불편함을 그대로 전달한다. 아멜리 노통브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독특한 필체와 상식을 뛰어넘는 사고방식으로 국내에도 팬층을 겸비한 원작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한국을 배경으로 각색해 종국에는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대한민국의 표준이 되어버린 주거형태 아파트는 대부분 사방에 누가 사는지 모른다. 하지만 부부는 은퇴 후 시끄럽고 복잡한 도심을 떠나 조용한 평화를 꿈꾸는 중장년층이다. 이웃과 잘 지내는 것도 편한 노후를 즐기는 인생 설계의 한 형태인 거다.
특히 호숫가에 단 두 채뿐인 이웃은 인사를 나누는 게 예의일뿐더러, 의사라는 직업은 안면 트는 게 이익이다. 점점 병원 갈 일이 잦아질 텐데 의사와 친해지고 싶었을 이유는 차고 넘친다. 교양과 학식을 두루 갖춘 교수와 교수의 아내라는 직업적 위신 때문이라도 먼저 인사를 나누려는 마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후 이유도 모른 채 오후를 빼앗긴 부부의 일상은 의문, 두려움, 히스테리로 가득해진다.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에 매몰돼 불편한 상황을 타파할 골든타임을 잃어버린다. 좋은 이웃이란 가면 때문에 진작해야 했던 말을 못 꺼내 내내 끌려다닌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묻지 않았고, 부디 나가 달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들어오지 말라고 거절할 수 있는 용기를 내지 못해 시달린다. 손절하지 못해 이웃, 지인, SNS 팔로우와 건강하지 못한 관계를 맺은 현대인의 자화상 같아 씁쓸하고 찝찝하다.
타인이란 지옥에 빠진 무지
집요한 한 사람으로 미스터리함을 더한다. 오프닝과 클로징에 두 번 등장하는 정인의 내레이션을 통해 요약된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지만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다. 차라리 자신을 모르던 무지한 상태가 편하다는 말이 이해된다. 그 행복을 굳이 파고들어 불행으로 만들지 말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행운을 불러올 것 같았던 집은 차 한잔 편히 마시지 못해 낯설어진다. 피로는 누적되고, 불면에 시달리며, 때로는 위험한 장소가 되어버린다.
교양과 학식을 두루 갖춘 부부는 서서히 참을성이 바닥나고 인격이 드러난다. 단편적인 몇몇 정보만으로 ‘저 사람은 저럴 거다’라고 단정해 버리는 행위, 마음대로 상대방을 오해하는 태도, 자기식대로 이해해 버리는 오만을 꼬집는다. 흔히 가난하면 불행하고, 부자이면 행복하다는 편견부터가 ‘너와 나는 태생부터 다르다’며 선 긋는 분리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오해는 오해를 낳고, 쌓이고 쌓여 폭력을 부른다.
타인이란 지옥으로 인해 민낯을 들춰보는 계기를 마련한다. ‘나란 누구인가’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물음을 끊임없이 던진다. 매일 같은 시각 찾아오는 육남은 어쩌면 위선으로 포장된 정인의 속마음(본성), 분열된 자아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의, 교양, 배려, 지식을 겸비한 괜찮은 현대인이라는 체면은 육남을 만나 완전히 벗겨진다.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한 자신을 타인이란 거울에 비춰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인간은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사는 무지몽매한 존재임을 깨닫는데 두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존재하는지 몰랐던 내면의 악마를 꺼내는 열쇠는 바로 옆에 있었다. 누군가가 너무 싫어졌다면 혹시 내 모습과 비슷한지 거울처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내가 혐오하는 모습의 또 다른 내가 거기 서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