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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장cine 수다

<브루탈리스트> 215분 순삭, 숏츠 세상에 도전장

by 장혜령

<브루탈리스트>는 215분이란 러닝타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꽉 찬 서사와 미장센으로 채워져있다. 극장 최초 의도된 15분의 인터미션까지 영화의 일부로 그려져 완벽하다. 흐름을 끊지 않고 맥락을 이어간다.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시대의 불운을 정면으로 맞은 천재 건축가의 굴곡진 30년 세월을 한편에 녹여내는 거침없는 행보다. 21세기에 만들어진 20세기 풍의 절정을 오랜만에 전해진다. 노스탤지어가 가득한 장엄함이다.

7년 동안 만들어진 장기 프로젝트만이 가능한 디테일과 장엄한 대서사시다. 허구의 인물이지만 실존 인물처럼 다가온다.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움직이는 타임라인에 맞춘 의도 때문일까. 한 인물의 생애를 들여다본 듯 생생하다. 50부작 대하드라마를 본 것 같은 핍박 받은 이민 역사와, 개인의 인생을 책으로 엮은 자서전 혹은 회고록 같다. 서문, 본문, 에필로그 구성으로 꾸려진 형식이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비스타비전 필름으로 촬영한 ‘브래디 코베’의 선구안이 빛난다. 유수의 영화제를 거쳐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 10개 부문에 이름을 올려 수상의 기대를 모은다. 천재 건축가 라즐로를 연기한 ‘애드리언 브로디’는 <피아니스트>로 최연소(만 29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을 연기했던 경험을 떠올려 전쟁 후 미국에 도착한 난민 ‘라즐로 토스’의 희로애락을 담았던 그가 또 한 번의 역사를 쓸 수 있을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차가운 콘크리트 속에 품은 뜨거운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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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건축가 라즐로(애드리언 브로디)는 전쟁 이후 헝가리에서 강제 추방당해 미국 이민을 택한다. 20세기 중반, 미국 사촌 집에 정착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순탄치 않았던 삶은 성공한 부호 해리슨(가이 피어스)을 만나며 고통과 환희를 경험한다. 그는 천재 건축가의 자질을 알아봐 라즐로에게 일생일대의 건물 설계를 부탁하게 된다.


다른 나라에서 제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 라즐로는 예술혼을 불태우지만, 모든 것을 돈과 명예로만 보는 해리슨과 사사건건 부딪치며 순탄치 않은 세월을 보낸다. 공사가 진행과 중단을 반복하며 지지부진한 날을 보내던 라즐로는 그의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리저리 상처받으며 견디어 간다. 자신의 제단을 설계하는 의식으로 변질된 일생일대의 과업을 마치는데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하지만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 이민자는 유령처럼 떠돌아다닐 뿐이다.


‘어둠’을 대하는 각기 다른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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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각자의 ‘어둠’을 다르게 드러내며 아메리칸드림의 명암을 보여준다. 라즐로는 전쟁의 상흔과 살아남았다는 부채감으로 내 외면이 어둠으로 둘러싸인 존재다. 늘 강제로 헤어진 아내 에르제벳(펠리시티 존스)과의 재회를 손꼽아 꿈꾸었지만 부적응자로 배회하는 데 그친다. 그러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랑을 기념하는 문화 센터 건축을 원하는 해리슨의 부탁을 받고 건축의 영감을 불태운다.


억눌린 천재성을 발현하게 해준 장본인인 해리슨은 겉과 속이 다른 자의식 강한 속물이다. 어둠을 숨긴 채 더욱 빛나는 면만 보이려는 가면 쓴 존재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이 의무라 생각하는 비뚤어진 자만심으로 똘똘 뭉쳤다. 라즐로와 처음에는 호감으로 만났다가 점차 혐오 관계로 치닫고 후반에는 라즐로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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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즐로의 아내 에르제벳은 신체적 어둠을 딛고 마음의 환희를 애써 드러내려는 강인한 인물이다. 오랜 수용소 생활에서 얻은 영양실조는 골다공증으로 이어졌다. 제때 치료받지 못해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지만 절대 굽히지 않는다. 사랑하는 남편을 언제나 응원하며 하나뿐인 조카 조피아를 보살피며 고통을 이겨내는 강인한 여인이다.


영화는 어둠과 빛처럼 인터미션을 기점으로 극명히 나뉜다. 전반부가 라즐로가 미국으로 이민 와 겪어야만 했던 차별과 멸시 냉대의 고난기라면, 후반부는 아내 에르제벳과 조카 조피아가 합류해 분위기가 반전된다. 개인과 민족의 투쟁으로 쌓아 올린 브루탈리즘 사조의 문화센터를 힘겹게 만들어가는 과정을 톺아보게 된다.


그래서일까. 극한 상황의 생존, 조국을 떠나온 이민자의 성공기처럼 보이지만 한없는 슬픔과 연민이 차오른다. 그가 만든 건축물은 수용소의 공포를 본떠 만든 고통의 산물이자, 돈이면 다 되는 미국을 상징하는 풍요 속의 빈손인 까닭이다. 멸시와 환멸을 이겨내는 방법은 마약과 향락으로의 도피였고, 가족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슬픔은 일 중독이 정답이었다. 생존의 안도감과 함께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불안의 그림자는 몸과 마음을 갉아먹어 피폐해진다.


시간의 흐름을 견디는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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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출 콘크리트 건물의 심플하고 차갑지만 육중하고 강인한 내외적 장점이 라즐로를 상징한다. 미니멀한 건축양식 중 하나인 브루탈리즘과 유대인 이민자의 텅 빈 심리가 공간의 미학을 극대화한다. 브루탈리즘은 1950년대 유럽, 특히 영국 전후 재건 사업의 일환으로 시작해 1980년대 초까지 전 세계적인 유행을 이꾸 건축 양식이다.


베통(브뤼통) 브뤼 (Béton brut) 즉, ‘날 것 그대로, 거친 콘크리트’라는 어원은 차가운 아름다움을 뜻한다. 20세기 중반의 핵심적인 건축 양식이었지만 사회주의, 공산주의 국가에서 전체주의적 사고를 표방한다고 해 비판받기도 했다. 한국에는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건물이 익숙하며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시초라 알려져 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어 낸 건축물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예술의 정수로서 건축가를 대변하는 상징으로 우뚝 남는다. 즉 견고함과 아름다움의 본질은 사라지지 않으며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성이 깃드는 데 있다. 빛과 그림자의 피할 수 없는 관계는 라즐로와 해리슨의 대조적인 관계로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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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폭력은 자유를 얻었다고 믿는 착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돌고 돌아 수미상관으로 끝나며 삶의 연속성을 나타낸다. 자유로 얻은 횃불을 든 여신상이 그의 눈에만 거꾸로 보이는 이유가 된다. 자유의 나라 미국의 허물은 아직 벗겨지지 않았다. 아메리칸드림의 허상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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