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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령 Jul 27. 2018

<킬링 디어>

그리스 신화에 빗댄 추악한 인간의 어리석음



<더 랍스터>에서 보여준 기이한 사랑 이야기로 관객에게 충격을 안겨준 ‘요르고스 란티모스’감독의 신작 <킬링 디어>는 수없이 많은 메타포와 다양한 해석, 종교적, 신화적 풀이가 공존합니다. 




오만하거나 어리석은 인간들은 '요르고스 란티못'감독 영화의 시그니처 같은 요소인데요.  페르소나라 할 수 있는 ‘콜린 파렐’이 중심을 잡으며, 영화<매혹당한 사람들>에서 보여준 ‘니콜 키드먼’과의 케미스트리, 차기 페르소나인 <덩케르크>의 ‘배리 케오간’까지 합세해.  잔인, 기괴, 불쾌, 불편, 역겨운 전대미문의 복수극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심장 전문의 ‘스티븐(콜린 파렐)’은 자신을 찾아오는 한 소년에게 몹시도 휘둘리는 듯 보입니다. 영화는 두 사람의 관계를 30여 분이 지나서야 밝히는데, 관객은 그동안 미스터리한 시선에 따라 부단히도 의심하게 됩니다. 사실 소년 ‘마틴(배리 케오간)’은 의료사고로 죽은 환자의 아들인데 거부할 수 없는 압박이 더해지며 점점 스티븐의 숨통을 조여 옵니다.


강렬한 오프닝, 뛰는 심장을 부감 쇼트로 보여주며 앞으로 영화가 어떻게 전개될지 미리 맛 보라는 듯. 영상과 음악으로 압도하고 있는데요. 이 장면은 실제 심장 수술 장면임이 밝혀지며 감독의 철저한 영화적 스타일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쯤 되면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특정 감독의 계승자였던 지난 타이틀을 내려놓아도 좋을 듯싶습니다. 이제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스타일을 개척한,  누구도 따라 하지 못할 영화적 성취를 가진 감독으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성공한 의사 부부에게 찾아온 섬뜩한 저주를 풀 방법은 스스로 이중성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 그들에게 찾아온 감내할 수 없는 힘, 스티븐과 안나의 아이들은 사지마비, 거식증, 피눈물을 흘리며 서서히 죽어갑니다.  부부는 아이들을 구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고군분투하는 사이.  마틴은 스티븐에게 알 수 없는 저주를 퍼붓는데, 셋 중 하나를 죽이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거란 경고를 날리죠. 

 


# 은유로 시작 해 은유로 끝나는 영화



스티븐이 마틴을 만난 식당에서 마틴은 감자튀김을 맨 마지막에 먹는 이유를 ‘가장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스티븐은 몇 년이 지나도 새것 같은 시계를 선물하는데, 대뜸 마틴은 가죽끈이 더 좋다며 바꿔도 되냐고 물어봅니다.



사실 이런 행동은 당신의 뜻을 거스르겠다는 일종의 선전포고와도 같은데요. 그 후 스티븐은 마틴이 쳐 놓은 덫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는데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 사실상 마틴이야 말로 겉보기에 성공한 중산층 가족의 최고 포식자인 셈이죠.



<킬링 디어>의 원제는 <더 킬링 오브 어 세이크리드 디어 The Killing of a Sacred Deer>로 직역하면 ‘신성한 사슴 죽이기’입니다. 서양 문화권에서는  사슴의 존재를 신화적으로 해석해 볼 수 있는데요. 이는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에서 차용했다고 감독을 밝힌 바 있죠.



트로이 전쟁 당시 전쟁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흰 사슴을 쏘아 죽인 아가멤논의 실수는 저주가 되어 딸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상황에 당도하게 되는데요. 감독은 그리스 신화의 모티브에서 현대인이 갖는 추악함과 본성을 찾았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생각나는 함무라비 법전을 이행하는 마틴의 복수는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일침을 만천하에 내 보이고 있죠. 이로써 <킬링 디어>는 죄와 복수, 심판에 관한 현대적 우화이자 큰 비극으로 와닿습니다. 



결국 경악스러운 악몽에서 벗어나고자 스티븐은 삶과 죽음을 운에 맡긴다는 듯, 러시안룰렛처럼 총을 겨누고 빙빙 돕니다. 충격과 꺼림칙함을 넘어선 날선 기분 나쁨을 보이는데 16년을 함께 살면서도 매일 밤 밀애를 즐기는 부부, 아이는 또 금방 가지면 된다고 말하는 웃음기 없는 대사는 공포감을 자아냅니다. 




‘킴(래피 캐시디’)과 ‘밥(서니 설직)‘은 집에 찾아온 마틴을 향해 겨드랑이 털이나 음모는 있는지 묻고, 자신의 초경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등 2차 성징을 궁금해하는 형태를 보이는데요. 스티븐은 이미 털이 수북한 어른이고 아이들은 그 단계를 부러워하며 경계를 넘어오지 못해 안달합니다. 하지만 아내 안나가 음모가 없는 것을 약점으로 갖고 있듯, 어른이 된다고 해서 누군가의 우상이거나 제대로 된 인간이 되지 못함을 비유하는 블랙 코미디입니다. 

 


 # 기분 나쁜 분위기, 나만 그래?


영화는 바흐와 슈베르트의 클래식부터 현은 뜯는 듣한 기분 나쁜 불협화음 등 '음악'은 영화를 이끄는 또 하나의 주인공입니다. 불쾌함은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해 초조하고, 불편한 서스펜스를 만들며  예민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분위기를 표현합니다. <더 랍스터>에 음악이 별로 없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킬링 디어>에서는 음악이 적재적소에 쓰였습니다.

 

마틴은 스티븐과 안나가 어렵게 구축한 체제를 무너트리며 내게 앗아간 하나를 너도 똑같이 내어 놓으라고 재촉합니다. 가족 전체를 쥐락펴락하면서  기묘한 방식으로 1:1 맞교환을 요구하는 마틴은 사이코패스를 넘어 악마의 형태라 해도 무방합니다. 


 


여러 장면에서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이 폭발하는데, 특히 마틴네 집에 찾아온 안나를 앞에 두고 아버지와 스파게티 먹는 방법이 닮은 게 싫다고 말하는 최후통첩의 스파게티 먹방. 당분간 토마토(인지 미트소스인지) 스파게티를 못 먹을 것 같습니다. 아침부터 불어터진 스파게티를 먹는다니, 도발적인 아침식사네요.



<킬링 디어>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여러 해석과 결말을 지을 수 있는 영화입니다. 누가 맞다 아니라라는 것보다 영화 전반을 아우르고 있는 불쾌함을 오감으로 느끼고 싶은 관객에게 추천합니다. 할리우드의 뻔한 공식의 영화가 지겹거나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오싹한 영화를 보고 싶다면 <킬링 디어>는 끈적이는  열대야처럼 당신의 기분이 꺼림칙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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