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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긴 혼잣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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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ty noodle Jan 14. 2023

뜨거운 효자 근황 보고

만회할 기회를 주십쇼

태어날 때부터 엄마를 고생시켰단다. 대체로 둘째는 첫째보다 수월하게 낳는다는데 아무래도 나는 일반적인 둘째는 아니었나 보다. 길고 진한 진통으로 엄마를 새벽까지 괴롭히다가 새벽 네시인가 다섯 시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것도 몸무게가 4Kg나 나가는 우량아로. 몸무게에 걸맞게 머리통과 몸집이 컸는지, 엄마는 나를 낳을 때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몸 마디마디가 늘어나는 것 같았다고 했다.


힘들게 낳은 딸은 잠도 쉽게 안 자고 설령 잠에 들어도 금방 깨어나 칭얼거리기 일쑤였다. 몹시 예민한 아이였다. 오빠 어릴 때처럼 몸이 약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마음이 약해빠져서 걸핏하면 울고 외로움도 많이 탔다. 약하기만 했던 마음이 나이를 먹으면서는 삐뚤어지기까지 해서 점점 지랄맞고 괴팍해졌다. 고등학교 때부터 20대 중후반까지는 엄마와 싸우기도 엄청 싸웠다.


더 나이를 먹어서는 엄마와 언성을 높이며 싸우지 않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속을 썩였다. 잦은 퇴사와 방황, 비혼 선언 등등.


"네 번째 회사는 이미 퇴사했고 다음 주부터 한 달 동안 스페인으로 여행 가는 비행기 티켓 끊었어"라고 말하던 날, 엄마는 지치고 허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누들아, 엄마 눈물 날 것 같아."라고 말했다. "네가 그렇게 된 게 내 잘못인 것 같아서." 


30년이 넘도록 자신의 삶까지 희생해 가며 지은 자식 농사가 대흉작이라는 강한 예감이 들 때, 과연 부모는 어떤 마음일까. 글쎄, 내가 헤아리긴 어려웠다. 그래서 그 말에 커다란 상처를 받았다. "네가 그렇게 된 게라니? 내가 무슨 괴물이 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엄마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하면서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찬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긴 여행을 하는 동안 종종 엄마에게 죄책감과 미안함을 느꼈다. 서른이 넘도록 효도는커녕 제 앞가림도 하지 못해 매번 휘청거리며 부모 속을 썩이고 걱정시키는 자식이라니. 스스로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삶 자체도 고달픈 와중에 의도하지 않게 불효자까지 된 듯해서 마음이 괴로웠다.


여행에서 돌아오니 나도 엄마도 많이 바뀌었다. 아니 엄마는 오히려 나보다 더 변해있었다. "지은아, 나는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할머니 아픈 거 보니까 사는 거 뭐 별 거 있나 싶더라.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네가 하고 싶은 걸 찾아. 나도 이젠 행복하게 인생을 즐기면서 살 거니까 너도 그렇게 해." 내가 없는 한 달 동안 엄마도 고민을 많이 했는지, 어느 정도 결연하고 담담한 표정으로 말해주었다. 신선하고 고마운 충격. 


그 말에 나는 다짜고짜 물었다. "엄마, 그럼 나랑 방콕 갈래?" 


사실 이미 한 적이 있는 질문이었다. 엄마는 이전부터 <걸어서 세계 속으로> 같은 프로에 태국이나 터키 같이 이국적인 나라가 나오면 "저런 나라에 꼭 한 번 가보고 싶다" 말하곤 했다.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 왠지 올해가 아니면 엄마랑은 단 둘이 여행 한 번 못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엄마한테 "내 퇴직금으로 올해 둘이 여행 가자!"라고 제안했었다. 


그때 엄마는 무척 망설이며 "너 괜히 돈 많이 쓰는 거 아니니? 엄마는 12월에 아빠랑 스페인 갈 거야. 다음에 가자."라고 했고, 그 말에 나는 속으로 '다음에 언제'하면서 툴툴댔다. 하지만 달라진 엄마의 대답이 여전히 같진 않겠지. 과연 이번엔 뭐라고 할 것인가. 


대답을 기다리는데, 엄마가 고개를 돌려 나란히 앉아있던 나를 바라보더니 소녀처럼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럴까?"


그 흔쾌한 대답 덕분에, 불효자가 된 지 30주년이 다 되어가는 이때 뜨거운 효도를 준비해 본다. 비행기표를 끊고 호텔을 예약하고 엄마가 좋아할 만한 관광지를 찾아보고 생전 맛본 적 없을 맛있고 이국적인 음식점 리스트를 추린다. 여행을 계획하고 떠나는 것도 오랜만이지만 여행 가서 무엇을 할지 찾아보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기분, 정말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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