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긴 혼잣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rty noodle Jan 07. 2023

어떤 병원

한 달 만에 병원에 방문했다. 사실 처음 이 병원에 방문한 이후로 다른 병원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너무 바빴다. 그 와중에 약은 오늘과 내일, 딱 이틀 치 밖에 남지 않았고. 일단 이번 달은 약이라도 타올 목적으로 후다닥 다녀오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일정을 마친 뒤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고 곧바로 접수하시는 분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당일 예약이 가능한가요?" 내 질문에 그녀는 "일단 대략적인 시간을 말씀해주시면 최대한 맞춰 드릴게요"라고 답했다. 


환자들 별로 없는 거 딱 아는데 맞추긴 뭘 맞춘담,  속으로는 구시렁댔지만 말로는 “아, 그런가요? 그럼 혹시 다섯 시 반도 가능할까요?” 능청을 떨었다. 그러자 접수하시는 분은 마치 가능한 일정을 체크하는 듯 잠깐 동안 말을 멈췄다. 


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내 앞뒤로 일정이 다 비었을 거라는 걸. 어쩌면 내가 오늘의 유일한 환자일지도 모른다는 걸. 어색한 연기 같은 짤막한 침묵이 지나간 뒤 그녀는 "네, 다섯 시 반까지 오세요”라고 말했다. 



시간을 적당히 맞춰 다섯 시 이십 분쯤 채비를 하고 나섰다. 날씨는 애매하게 서늘하고 흐릿했다. 봄이 오는 거야, 마는 거야. 흐린 하늘을 보며 속으로 구시렁댔다. 그 와중에 이미 한 번 다녀온 길이라고 눈에 익어서 이번에는 헤매지도 않고 제시간에 도착했다. 


병원에 도착하니 아니나 다를까, 대기 중인 환자도 없었다. 데스크에 앉은 분께서 내 이름을 묻고는 바로 진료실로 안내했다. 깔끔은 하지만 무척 정 없어 보이는 진료실, 그리고 그 안에 눈빛부터 어쩐지 신뢰가 가지 않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나는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투명 가림판이 놓여있는 의자에 앉았다. "원래 예약일보다 일주일 늦게 와서 죄송해요." 속에도 없는 말을 했고, 그는 딱히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동안 기분은 어떠셨어요?” 오늘은 웬일로 정신의학과 선생님다운 멘트인걸.


하지만 그와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빠르게 약을 타고 나서기 전에 시켜둔 아보카도 치킨 샐러드나 우적우적 먹고 싶었다. "바뀐 약도 잘 듣는 것 같았고, 한 달 동안 큰 감정 기복 없이 잘 지낸 편이에요.” 


여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나의 유별난 자기 개방성이 참지 못하고 그만,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최근에 비교적 힘든 일이 있었는데, 그래도 꽤 잘 넘겼어요.” 그 말에 그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힘든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었나요?” 


마음 같아서는 그에게 “그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네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이슈를 그에게 미주알고주알 떠들고 싶은 만큼의 신뢰는 우리 사이에 쌓이지 않았니까. "음..." 말할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대답하는 것이 이렇게 꺼려지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슬프지만 나는 의외로 싫은 말은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적당히 포장한 말을 던졌다. 그랬더니 그는 메모도 안 하고 눈빛을 반짝이며 내 이야기에 집중하더니 이런저런 추가 질문을 했다. 그중에는 이게 내 정신 건강과 대체 무슨 관계인가, 하는 생각이 들만한 것이 수두룩했다. 


결국 나는 원치 않는 티키타카에 끼어들어 오랜 대화를 나누었다. 분명 환자는 나인데 그의 말이 너무 많았다. 심지어 나의 정신 건강에 별로 도움이 되는 것 같지도 않고, 듣고 싶지도 않은 조언과 충고 같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꼰대 같은 정신과 의사는 난생처음이네.


진료실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무렵엔, 오늘 내가 그곳에서 늘어놓은 이야기를 종합해 이런저런 추측과 평가와 판단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가 나에 대한 것만 다룬다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내가 이야기한 모든 등장인물들에 대해서 자기 혼자 추리 소설을 쓰고 앉았다. 


아니, 그냥 제가 다 알아서 생각 정리하고 마음 챙길 테니까 약이나 주시라고요, 하고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꾹꾹 참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라, 별로 친하지도 않으면서 나의 고민 얘기를 캐묻고 심지어 과몰입까지 하는 불편한 동료처럼 느껴졌다. 


의도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는 너무 나와 눈을 맞추고 조잘대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핸드폰을 꼼지락거리는 일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대체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아가려고 그러는지. 


우여곡절 끝에 내가 대화를 커트하고 상황을 마무리하자, 그도 드디어 눈치를 채고 2회기 진료를 마칠 준비를 했다. “약은 몇 주치 지어드릴까요?” 탈출이 눈앞에 다가왔다. 속으로는 환호성을 질렀지만 겉으로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음, 4주 치가 좋을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여기서 순순히 약을 주면 그가 아니지. “음, 3주 치만 지어 드릴게요. 3주 뒤에 뵙죠!” 그는 마지막까지 이상한 의사였다. 아니, 이럴 거면 내 의견은 왜 물어본 거야? 


아무래도 그는 내 마음 상태보다는 아까 말한 그 상황이 어떻게 정리가 되었는지 한시라도 빨리 알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반박하고 싶은 에너지도 없어서, 일단은 웃으며 “네, 그럴게요”라고 대답했지만 앞으로는 정말로 절대로 가지 말자고 굳게 다짐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진료실에 붙잡혀 있다가 풀려났다. 다른 선생님이 그랬다면 나를 위해 귀한 시간을 내주신 것에 감사함을 느꼈을 텐데, 이 사람에게는 어쩐지 화가 치밀었다. 파리 날리는 진료실에 나타난 유일한 환자를 자기의 말동무로 이용해 먹은 것만 같은 그런 킹리적 갓심이 꿈틀꿈틀. 으, 다시 가나 봐라.


매거진의 이전글 히피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