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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ty noodle Oct 29. 2020

히피펌

2020년 8월 29일 오전 11시 32분에 저장한 글입니다.

퇴사를 앞둔 7월 말엔 히피펌을 했다. 히피펌은 동네 미용실에 가서 "오래가는 파마 해주세요"하면 볼 수 있는, 머리 뿌리부터 롯드를 말아서 만들어주는 아주 꼬불하고 풍성한 파마 모양이다. 


내 기준에서는 꽤 과감한 머리 스타일이었지만, 솜씨 좋은 미용사 언니를 만난 덕분인지 아님 '안 어울리면 이참에 삭발하자'라는 용맹함에 하늘이 탄복한 건지 결과물은 꽤 괜찮게 나왔다. 




히피펌에 꽂힌 계기는 한 연예인의 인스타그램 사진이었다. 여느 날과 같이 퇴근 후에 침대에 늘어져서 '퇴사를 하긴 해야겠는데 대체 언제 말하면 좋을까'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습관적으로 핸드폰으로 인터넷 기사들을 뒤적이다가 그녀의 사진을 봤다. 


그리고 그 '히피퍼피'한 헤어스타일은 내게 커다란 감흥을 주었다. 이 머리 모양을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보다 더 자유분방해진 사고를 하게 되어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수, 아니 심지어 새로 태어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마음속에 몽실몽실 피었다. 


하지만 미용실에 가기까지는 두 달 정도 걸렸다. 그동안 회사에는 퇴사 의사를 밝히며 미약해진 심신을 이유로 재택근무를 신청했고, 여러 회차로 나누어 진행한 회사 행사를 도왔다. 중간중간 인스타그램이나 네이버로 수많은 사람들의 히피펌 사진과 히피펌으로 유명하다는 헤어샵들을 검색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히피펌 시술 가격이 이제 곧 백수가 될 내게는 너무나 비싼 금액으로 느껴져, 어느 순간부터는 우리 동네 오래된 미용실에서 아주 싼 가격으로 히피펌을 했다는 후기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만 어영부영 지나갔고 내 머리는 여전히 밋밋한 긴 머리였다. 그러다 회사 행사를 마친 뒤 휴가를 내고  속초에 갔을 때, 그곳에서 불현듯 '아, 역시 파마를 하고 바다에 왔어야 했어!'하고 후회했다. 


그날로부터 2주 뒤에 합리적인 가격의 헤어샵을 찾아 함께 예약했다. 왜 후회를 한 뒤 바로 예약을 하지 않았는지, 왜 실컷 '동네 미용실'을 찾아보다가 동네도 아닌 '헤어샵'을 예약한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원래 인간은 합리적인 척을 하지만 때때로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인 선택을 해버리고 마는 존재니까.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그날은 퇴사하기 일주일 전이자 회사의 창립 기념일이었다. 오전엔 당분간 받지 못할 '직장인 건강검진'을 받았고, 건강검진을 마치고는 예약한 헤어샵으로 향했다. 머리를 다 하고 나올 때의 파격적인 헤어스타일과 잘 어울리도록 매끈매끈한 호피무늬 블라우스도 챙겨 입고 갔다. 


두 시간 정도면 끝날 거라고 했던 머리는 세 시간을 훌쩍 넘겼다. 


나와 동갑이라던 디자이너 선생님은 적당히 물기를 말린 촉촉한 머리를 손질하며 "생각보다 너무 잘됐는데요?" 연신 감탄했다.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떠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바라봤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이후로 처음 해보는, 머리 전체가 굽실굽실한 스타일이 낯설었다. 


그러나 디자이너 선생님의 말처럼, 생각보다 '너무' 잘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과연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던 걸까 궁금해졌다. 어쨌거나 다행히, 삭발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결과였다.


미용실 밖으로 나오자, 90년대 미스코리아 헤어스타일 같은 풍성한 사자머리를 하고 호피 무늬 블라우스를 입은 키 큰 여자를 몇몇 사람들이 흘끗거렸다. 블라우스는 굳이 튀는 걸로 입지 말걸 그랬나. 버스정류장에 가는 동안, 반사되어 비치는 유리만 보이면 그때마다 내 모습을 힐끔힐끔 곁눈질했다. 


집으로 가는 동안 머리의 물기는 점점 말라갔다. 집으로 돌아와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거울을 봤을 때, 비로소 푸슬푸슬하고 곱슬곱슬한 내가 원했던 그 머리가 완성되어있었다. 


크, 이거지. 그제서야 흡족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웃음이 지어졌다. 거울을 볼 때마다 미소를 짓다가 한껏 기분이 들떠서 평소에 잘 찍지도 않는 셀카를 잔뜩 찍었다.




자, 그렇다면 벌써 한 달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파마를 하고 나면 보통 보름 뒤에 다 풀려버리는 나인데도 이 머리는 지금까지 딱히 풀린 기색 없이 여전히 곱슬거리고 있다. 


하루 정도 머리를 감지 않아도 티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틀에 한 번 꼴로 머리를 감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히피펌이 근본적으로는 동네 미용실의 제일 오래가는 꼽슬파마와 같은 정체성을 갖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내 인생 머리라서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코로나에 장마에 태풍으로 현관문 밖이 두려운 다이내믹 2020년에 내가 잘한 선택 두 가지를 고르라면 고민할 것도 없이, 백수가 되기로 한 것과 더불어 히피펌을 한 것을 꼽을 거다. 백수 만세! 히피펌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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