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탄핵 위기로 몬 결정적 사건은 ‘우크라이나 의혹'이지만, 사실 그가 일국의 대통령으로 얼마나 문제적 인간인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은 지난 7월 트위터 사건이었다.
그가 친절하게(?) 트위터로 다양한 뉴스거리를 쏟아낸 것이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 가운데 지난 2019년 7월 14일 오전 5시 27분 날린 트윗은 ‘자유와 평등의 나라’라는 미국의 허상과 깊숙한 인종차별주의의 민낯을 드러내며 전 세계인들에게 커다란 실망감을 안겨줬다.
그의 트윗 전문은 이랬다.
“민주당 '진보파' 여성의원들을 지켜보는 게 참 흥미롭다. 이들은 정부가 완전히 재앙적이고 전 세계에서 가장 부패하고 무능한 나라 출신이다.
그들은 이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나라인 미국이 어떻게 운영돼야 하는지 목소리를 높여 사납게 말한다. 원래 나라로 돌아가서(Why don't they go back) 완전히 무너지고 범죄로 들끓는 곳을 바로잡으면 어떤가. 그곳들은 당신들의 도움을 매우 필요로 한다.
낸시 펠로시(미 하원의장)도 신속하게 귀환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다.”
트럼프가 지목한 민주당 여성의원들은 푸에르토리코 계, 소말리아계 무슬림, 팔레스타인 난민 2세, 그리고 흑인이다. 이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반(反) 이민정책에 대항해 이민단속기관들에 대한 긴급구호예산 편성에 반대하자 이 같은 트윗을 날린 것이다.
2. 2019년 9월 미국 거주 한인 기혼여성들의 한 온라인 카페에 하루에 모두 겪었다고는 믿기 힘든 생생한 인종차별 경험담이 올라왔다.
어린 자녀와 함께 포토맥 강변에 나들이 나선 한국 여성 A 씨. 지나가던 한 흑인 아이로부터 “재패니스 우웩!”이란 말을 들었다. 아이 아빠는 사과 한 마디 없이 말없이 아이를 쓱 끌고 갔다. 이어 A 씨는 한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고 앉아 주문을 기다렸다. 이어 들리는 다른 테이블의 소곤거리는 소리… “동양 여자애들은 잠자리에서 굉장히 소리를 잘 낸다며… 쟤도 소리 잘 낼 것 같지 않아?”
다양한 국가에서 새로운 희망을 좇아 찾아온 이민자들의 나라가 21세기 현시점에도 얼마나 극심한 인종차별의 장인지 깨닫게 해 주는 장면들이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소수자들에게 흔히 쓰는 대표적인 혐오발언이다. 재일동포들이 일본의 극우주의자들의 혐한시위 현장에서 흔히 듣는다. 유럽 무대에서 뛰는 한국 운동선수들이 어렵지 않게 맞부딪히는 말이기도 하다.
같은 한국인이 타지에서 이런 일을 당한 소식을 접하면 당연히 혈압이 오르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마치 내가 겪은 일인 양 감정이입이 돼 '어떻게 그렇게 무식하고 교양 없는' 언행을 저지를 수 있는지 분개한다. 그리고 해당 국가가 과거 아시아나 아프리카 지역을 식민 통치하며 자행했던 만행도 어김없이 소환해 곱씹는다.
그렇다면 이제 한 번 대한민국으로 무대를 옮겨 생각해 보자.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등에서 건너온 이주노동자 인구가 2018년 기준 100만 명을 넘어섰다.
결혼이민자와 외국인 유학생 등의 규모까지 더하면 국내 체류 외국인 수는 2016년 기준으로도 이미 200만 명을 넘는다. 이 가운데 절반 가량은 한국계 중국인이고 그 외 많은 사람들이 중국인,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가족의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건너온 이들이다.
한국인과 결혼이민자들이 이룬 '다문화 가정'의 인구는 2017년 기준 101만 명으로 전체 우리나라 인구 중 2%에 이르고, 매해 태어나는 아이 100명 가운데 5명 꼴이 이 같은 다문화 가정의 아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들을 보는 시선 역시 트럼프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파퀴벌레’(파키스탄 출신 이주노동자를 바퀴벌레에 빗대 비하하는 말), ‘흑형’(흑인 남성), ‘외노자’(외국인 노동자를 줄인 말) 식으로 부르는 것은 다반사다.
국내 논문에 소개된 아프리카 말리 출신 한 이주노동자의 사례는 이렇다.
"버스나 지하철 타면 한국 사람들이 피해요,옆에 자려가 있어도 한국 사람들이 딴 데 앉아요。 버스 탔을 때 버스 기사가 “내려!" 그랬어요. 어떤 버스 기사는 차를 아예 못 타게 해요. 냄새난다고. 어떤 버스 기사는 자기 뒷자리에 앉으면 다른 자리로 가래요. 냄새난다고. 어떤 버스 기사는 향수 같은 거 나한테 뿌렸어요. 한국 사람들은 아프리카 사람들은 다 AIDS 걸린 줄 알아요. 한국 티브이에서 아프리카 AIDS 많다고 해서 한국 사람들 아프리카 사람들 피해요. 까만 사람 싫어해요. 가난해서 한국 왔다고 싫어해요." (말리 출신 28세 남성 이주노동자. 경기도)
지난 2012년 국내 일간지에 소개된 사례는 이렇다.
어머니가 몽골 출신인 초등학교 5학년 B군은 수업 시간에 교사로부터 "한국 사람은 양보를 잘하는데 몽골 사람은 싸움을 잘한다"는 차별적인 발언을 자주 들었고, 교실에서 도난 사고가 발생하자 B군을 비롯한 몽골 출신 아버지나 어머니를 둔 아이들을 가장 먼저 의심을 받았다.
미국 땅에서건 한국땅에서건, 한국인이 피해자이건 가해자이건 일상에 침투하는 혐오표현에 엄중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서로 존중하고 신뢰를 지니기 위해서다. 혐오표현이 피해자의 자아에 얼마나 커다란 상처와 분노를 남기는지 사소한 경우라도 겪어본 이들은 모두 동의할 것이다.
또한 혐오표현은 말을 넘어 구체적인 차별행위와 폭력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에이, 그냥 하는 말인데 뭐'가 아니라 반드시 예민하게 반응하는 세포를 지녀야 한다.
미 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 지난 2017년 11월 기사를 보면, FBI 집계 기준으로 미국 내 증오범죄 규모가 2016년 6100여 건에 달했다. 이는 전년도보다 5%가량 증가한 수치였으며 이 가운데 절반이 넘는 57%가 인종과 관련됐다. 반유대주의와 반이슬람 등 종교 관련도 많았다.
숙명여대 홍성수 교수는 책 <말이 칼이 될 때>에서 혐오표현을 "소수자에 대한 편견 또는 차별을 확산시키거나 조장하는 행위 또는 어떤 개인, 집단에 대해 그들이 소수자로의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멸시·모욕·위협하거나 그들에 대한 차별, 적의, 폭력을 선동하는 표현"이라고 정의했다. 차별과 폭력을 선동하고 조장하는 것이 바로 혐오표현이라는 날카로운 대목이다.
제러미 월드론(Jeremy Waldron)은 <혐오표현, 자유는 어떻게 해악이 되는가>(원제: The harm in Hate Speech>에서 "피해자 개인이나 집단의 정신적·신체적 피해는 물론 사회적으로는 특정 집단과의 갈등을 유발해 사회통합을 저해시킬 수도 있다."라고 경고했다.
미국 CNN방송이 트럼트의 트윗을 놓고 "소수자들을 향한 트럼프의 언어는 소수자들이 겪을 폭력의 가능성도 높인다.”라고 우려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영화 <기생충>에서 성공한 사업가 동익(이선균 분)은 '지하철 냄새' '지하실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에게 극도의 혐오감을 표현한다. 그리고 결정적 순간, 동익의 '혐오 제스처'에 기택(송강호 분)은 마침내 이성을 잃는다. 결말은 모두의 몰락이고 비극이었다.
개개인이 지닌 생각과 취향, 호불호는 다르다. 하지만, 이 세상은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다. 인간이 자신을 표현할 자유가 있다면, 또한 한 편으로 자신을 보호할 권리와 타인을 해하지 않을 의무를 지닌다. 공존하는 세상을 위해 혐오표현에 대한 예민하고 뾰족한 세포, 날카롭고 섬세한 감성을 지녀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