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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개 Mar 07. 2022

[인터뷰] 네가 재미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해봐

[낄낄 프로젝트] 네 번째 친구 '온윤' 김예린 작가

낄낄 인터뷰 프로젝트의 시작이 궁금한 사람을 위한 가이드 → [낄낄 프로젝트의 서막] 클릭



김예린. 아주 오래된 단짝의 언니이자 회사 선배. 동생과 언니, 후배와 선배 사이 묘하게 얽힌 관계에서 내게 예린 선배는 다정한 언니이자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이었다. 인터뷰를 핑계 삼아 커피 한 잔 마시기로 한 날, 나는 지각하고 말았다. 기나 긴 연휴를 맞아 밖으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 신호를 기다리며 길게 줄 선 차들. 도로 한가운데서 다리를 달달 떨며 브레이크와 액셀을 거칠게 밟던 나는 여유롭게 집을 나선 30분 전의 나에게 꿀밤을 '콩' 때리고 싶었다.   

   


도착하자마자 커피를 주문하고 선배를 마주한 순간  눈물 나는 반가움과 죄송함 머릿속에서는 무수한 변명거리들이 생성되고 있었다. 입 안에 머무는 말들이 속절없이 배출됐고 하지 않아도 될 말은 기어이 툭툭 삐져나왔다. 내 뇌는 제발 멈추라고 지시 내렸고, 갈 곳 잃은 말들은 에라 모르겠다 질서 없이 입술 밖으로 낙하했다. 에휴. 나는 2년 만에 보는 선배에게 장황한 푸념 대서사시를 늘어놨다. 화장기 없이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타나 앉자마자 잡티를 제거했다는 근황과 함께 자기 할 말만 쏟아내는 억울한 여자의 모습을 보던 선배는 눈물을 보였다.      



글. 햇배           




차곡차곡 쌓은 성취감, 자신감의 동력으로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듣자 하니 동생이 먼 곳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어찌 슬프지 않냐고. 친언니도 안 우는데 친구 언니가 내 사정을 딱히 여겨 눈물을 흘린다. 선배 미안해요. 변명이 넋두리가 되었어요.  곁에만 있어도 의지 되는 사람의 존재란 이토록 든든하. 순간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선배이자 언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어린 시절의 김예린은 어떤 아이였나요?

“초등학생 땐 엄청 소심한 애였어.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선생님이 발표를 시키면 앞에 서서 우물쭈물하던 아이였지. 그런데 엄마가 학부모 초청 수업에서 소심한 딸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 거야. 그때 내게 자신감을 얻는 책을 사주더라고 (웃음). 또 초등학교 수행평가가 철봉에 올라가서 돌고 착지하는 동작인데 무서워서 못했거든? 엄마가 매일매일 연습시켰어. 딸에게 자신감이 생기길 바랐겠지. 성취감도 느끼게 하고 싶고.”




― 어머니 대단하시네요.

“초등학교 4학년 담임선생님도 좋은 분이셨어. 나뿐만 아니라 모든 아이에게 칭찬과 함께 균등한 기회를 주셨지. 매달 상을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상장을 주셨고 너희들은 뭐든지 다 잘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워 주어. 선생님이 ‘예린아 넌 야무지고 똑똑해서 변호사도 할 수 있고, 의사도 할 수 있고, 기자도 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해주신 게 기억나. 그게 자신감의 근원이 된 거야.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애구나. 엄마가 내게 자신감이라는 씨앗을 뿌렸다면, 선생님은 1년 동안 물을 준 거야.”     




― 어렸을 때 꿈은 뭐였어요?

“그때 엄마가 방송반을 해보라는 거야. 당신 어릴 적 로망이었겠지. 방송반에 들어갔는데 썩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어. 매일 멘트를 써서 마이크 잡고 방송하는 게 재밌었거든. 중학교 가서는 매주 수~목요일 8시에 아침 방송을 해야 해. 누가 듣던 내 마음대로 방송하는 재미, 그런 즐거움을 차곡차곡 쌓아갔지.”     




―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는요?

“일단 내가 자신감이 생겼잖아? 장래 희망이 많아지면서 가수도 하고 싶고, 뮤지컬 배우도 하고 싶고,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러다가 TV에서 기자들이 뉴스 마지막에 ‘KBS 000 기자입니다’라고 말하는 게 멋있어 보였단 말이지. 중학교 올라가서는 유명했던 프로그램 중 하나가 ‘어른들은 몰라요’라는 교양 프로그램이었어. 그때 청소년 모니터링단을 모집해서 참여했는데 인터넷 카페에서 제작진들이랑 소통하면서 PD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이런 생각을 하며 막연하게 꿈꿔왔지.”    



  

― 여러 꿈이 있었는데 대학 생활을 하면서 길이 명확해진 건가요?

“사실 수능을 망쳐서 원하는 대학에 못 갔어. 입학 후 2년 동안은 패배주의자처럼 살았던 것 같아. 학교생활이 너무 싫었어. 때마침 남자 친구가 생겨서 놀기 바빴지. 그러다가 대학교 2학년 때 휴학을 한 번 하고 사범대에 가고 싶었어. 근데 편입하려고 해도 자신이 없는 거야. 차라리 복학하면서 ‘지금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걸 찾아봐야겠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      


왜냐하면 내 주변에 서울에서 공부하는 친구들이 많았거든? 가끔 서울 가서 만나보면 여기의 세계와는 또 다른 거야. 대외 활동도 정말 열심히 했어. 해외 봉사활동도 했는데 참가자들이 전국에서 모이다 보니 잘난 애들을 그곳에서 다 봤단 말이야. 영어 PT는 기본이고 문화 자체가 어나 더 레벨인 거지. 나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용썼다고 해야 하나? 대외 활동을 하면서 시야를 넓혔어. 지방이라서 안된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여기서 할 수 있는 걸 찾아야 했지.”     




―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멋져요. 졸업 후 첫 사회생활은 어디서 시작하셨나요?

“김해뉴스. 우연한 기회였는데 학과 교수님이 ‘김해뉴스에서 사람을 뽑는다는데 너 해볼래?’ 이렇게 된 거야. 그래서 면접을 보러 갔지. 그때 사장님이 만장대 해은사에 가서 르포 기사를 써오래. 열심히 써갔는데 기사를 읽으시곤 ‘이건 블로그에나 쓰는 글'이라며 혹평하셨지. 하하. 내가 기사를 제대로 써봤겠니? 수업 때 실습밖에 안 해봤는데. 회사에서 나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모르겠지만 사회부 기자로 출근하게 됐어.”          




경찰서 앞에서 한숨 푹푹 쉬던 사회초년생이 전투력 만렙 사회부 기자로

내가 입사했을 때가 아마 선거철이었을 거다. 선배는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한참을 실랑이하더니 “그럼 고소하세요!!”하고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아마 선거캠프 관계자가 허무맹랑한 요청을 했고, 거절당하자 분에 못 이겨 고소라는 단어를 먼저 꺼냈을 것이다. 선배는 뜻대로 하시라, 간결한 대답으로 통화를 (일방적으로) 끝맺었다. 아, 사회부 기자는 저래야 하구나. 전투력 쪼렙이 실시간으로 목격한 악성 민원 해결 현장이었다.       




― 첫 출근, 기억하나요?

“처음에는 중부경찰서 돌고 서부경찰서에 인사하러 갔어. 다음 날부터 서부서 출입기자가 됐지. 나는 어릴 때부터 경찰서는 나쁜 놈이나 가는 곳이라고 배운 사람이었거든?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라서 경찰서 문턱을 넘는 게 너무 힘들었어. 매일 아침 서부경찰서 벤치에 앉아서 고민했지. 내가 여길 왜 들어가야 하는 것이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거야.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기사를 쓰라는데 어떻게 알겠냐고. 맨땅에 헤딩하는 마음으로 서에 들어갔지. 한겨울인데도 겨드랑이에 땀이 나더라니까?”     




― 경찰서로 출퇴근하는 일과가 만만치 않네요.

“처음 두 달간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어. 훈련을 받은 게 아니니 기사도 잘 못 썼지. 메이저 신문사는 적어도 한 달은 교육하는데 지역 신문사는 그런 게 어디에 있냐? 맨땅에 헤딩이지. 매일 아침 경찰서 한 바퀴 돌고 사건 보고할 때마다 몇 번이고 다시 내려가서 형사과에 물어봐야 했어. 밧줄은 몇 cm인가요, 칼 길이는 몇 cm인가요.”     


속칭 사스마와리. 캡의 질문에 대답을 못 하면 몇 번이고 형사과에 내려가서 밤새 야근한 팀장을 붙잡고 사소한 것까지 물어봐야 한다. 나의 사수는 피해자의 머리끈 색깔까지 물어봐야 했다는데, 여하튼 형사과 팀장이 퇴근해버리면 그날 하루는 매우 고단해지므로 신속한 발놀림과 허를 찌르는 (뭘 이런 것까지 싶은) 질문은 필수.      


“취재 끝내고 회사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팀장님이 옆에 세워두고 내가 쓴 기사를 보면서 ‘이건 뭔데, 건 어떻게 되는 건데’라며 집요하게 물어봐. 진짜 머리털이 쭈뼛쭈뼛 서는 거야. 모자람은 너무 많고, 그 모자람을 채우기까지 시간은 너무 많이 걸리고. 그 팀장님이 까칠했거든? 사회 초년생이 적어도 10년 이상 사회생활 한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거야. 그 사람 눈에는 얼마나 웃기겠니? 처음 1년 반은 그렇게 팀장한테 쪼이는 꿈꾸고 그랬지.”     




― 기자 생활하면서 깨닫게 된 게 있다면요?

사회에서는 밥숟가락 먼저 떠서 입에 넣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내 밥그릇은 내가 챙겨야 한다는 것.”     




― 하하. 그 말 자주 해주어요.

“매일 경찰서에 출근하면서 경찰을 봤잖아. 이 사람들과 매일 인사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맺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건을 깊게 안 파면 ‘아무것도 없다’라고만 이야기하는 거야. 그런데 이 사람을 탓할 수도 없지. 그리고 두 번째는 모든 사람이 나에게 친절하지 않다는 것. 사실 친절할 이유도 없고. 그건 내가 바랐던 기대와 환상이었지.”  



   

― 얻은 것도 있겠죠.

처음 만난 사람도 어제 만난 사람처럼 편하게 대하는 방법. 그게 몸에 익었지. 기술적으로 하는 건 아냐. 취재하기 위해서 몸에 익은 태도겠지? 쉽게 공감하고, 사람을 편하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을 얻었어. 그리고 우리는 조판 편집도 하고 기사도 쓰고 다 했잖아. 적어도 글 쓰는 게 두렵지 않아.”        




   

글을 쓰는 것, 내 이름으로 사는 것, 김예린이 된다는 것     

'엄마'와 '글 쓰는 노동자' 사이에서 두 역할을 오가는 경계인의 일상은 애매하다. 노트북 앞에서 글 쓰다 세탁기가 세탁을 마쳤다는 알람을 울리면 쓰던 걸 잠시 멈추고, 세탁기에서 건조기로 빨래를 옮긴다. 글 쓰다 머리를 환기시킬 때도, 바닥에 드러누울 때도, 쉼은 온전하지 않다. -  '엄마'와 '글 쓰는 노동자' 사이  브런치 발췌






― 기자 생활하면 다양한 직종의 사람을 만나잖아요.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직업의 세계가 확장되면서 여러 갈래의 길이 열릴 텐데 계속 글을 쓰고 계시네요.

“육아하면서 일을 그만뒀잖아. 아이를 키우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많이 생각했어. 적어도 나는 아이 엄마로만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 김예린, 내 이름으로 사는 순간이 나에겐 숨 쉬는 시간인 거야. 자아 성취감에 목말랐던 사람이었지. 여러 직종 가운데 글 쓰는 게 접근하기 제일 쉬웠어. 여러 감정을 풀 데가 없으면 글을 써. 머릿속에 계속 글감이 떠돌아다니니 잠도 못 자. 너무 피곤하면 메모장에 적어 놓고 새벽이나 다음 날 아침에 썼어. 글은 나에게 제일 큰 안식처이자 해방구가 됐지.”     



기록사업을 하는  '온윤'의 대표이자 작가 김예린. 황새를 모티브로 한  '온윤' 로고는 일러스트 작가 DORI의 작품.




― 혼자서 기록사업을 하는 모습을 보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처음 1년 동안은 정체성을 찾았어. 내가 무엇을 즐거워하고 잘할 수 있을지 말이야. 그래서 글과 관련된 일이라면 다 해봤어. 첫 번째는 문체부에서 생활 기록가 양성 사업을 하길래 참여해봤는데 재밌진 않았어. 단순히 녹음한 걸 푸는 일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잖아? 테크닉이 필요하지 않아서 탈락. 두 번째는 에세이를 써서 뉴스레터(메일링 서비스)를 시작했어. 한 달간 총 20개의 글을 구독자들에게 보내주는 거야. 재미는 있는데 이건 어떤 방향으로 이어나가야 할지 고민 중. 그리고 김해문화재단에서 진행한 김해 문화인물 사업을 진행했어. 지역 문화예술가나 리더들을 시민에게 추천받아 인터뷰한 프로젝트였어. 또 작은 도서관에서 아이들에게 글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는 수업도 진행했지.”     



경남도민일보에도 소개된 메일링 서비스



 육아와 일을 함께한다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 있을까요.

나로 사니까. 그때만큼은 김예린이라는 이름으로 살지. 잃어보니 알겠더라고. 둘째 아이 낳을 때까지 3년이란 시간이 나한테는 너무 힘들었어. 섬에 갇힌 기분? 베란다에서 밖을 보는데 아기를 안고 있는 나는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는 거야. 모든 부모가 그렇듯 오롯이 한 생명체가 잘 자라기 위해 양육자의 희생이 필요한 시간이 있단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신랑도 그랬겠지만 힘들었어. 이후에 브런치 작가를 신청해서 글도 쓰고, 문화재단 아카이빙 사업에 참여하며 시작 게 여기까지 왔지.”     



글감이 둥둥 떠다니는 잠 못 이루는 밤엔 글을 쓰곤 했다. --- 김예린의 브런치 바로가기 클릭



―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나요?

“중도 입국 청소년 인터뷰. 아이디어 콘텐츠 공모에 당선돼 진행하는 거야. 사실 기자 때부터 미등록 이주아동 문제는 꾸준하게 챙겼는데 중도 입국 청소년들도 돌봄이 필요해. 이 아이들이 한국에서 성인으로 성장하기 위해 어른들이 조력자로서 신경 써야 하는데 미비한 상황이거든. 이 문제를 다뤄보고 싶어서 기획하게 됐고, 운 좋게도 부산의 한 출판사에서 판매·유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는 회신을 받았어.”     




― 우와. 선배의 첫 책이 되는 거네요.

“얼마나 잘 이끌어갈 수 있는지는 나의 역량이겠지만, 사회에 나오면서 나는 나를 증명해야 했어. 작가라는 직함으로 타인에게 말을 건네면 ‘그래서 무슨 책을 내셨나요’라는 질문이 돌아왔기에 조급했지. 등단에 대한 욕심이 생겼고 만족스럽진 않지만 뉴스레터로 발행한 글을 엮어 책으로 낼까도 싶었어. 사람들은 내가 증명되길 원하니까.”     




― 지금은 어때요?

천천히 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 내가 이슬아와 은유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기존 질서에 편입되지 않고도 충분히 자기 색깔을 나타내면서 역량을 발휘해 작가로 생활하기 때문이야. 이슬아 작가는 등단 생각이 없냐는 기자의 질문에 왜 등단해야 하는지 반문했고, 은유 작가 등단하지 않아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기에 힘을 얻었지.”     



김해문화인물 토크쇼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예린. 영상 캡쳐



― 인스타그램을 보니 영상 촬영하며 진행까지 하더라고요.

“첫 번째는 인건비를 감소하기 위한 현실적인 문제였 (웃음). 두 번째는 어릴 때 방송반을 했다고 했잖아? 난 마이크 잡는 걸 좋아했어. 예전에 교통방송 리포터 시험도 봤을 만큼.”     




― 떨리지 않으셨어요?

떨리는데 즐기는 거지. 나서서 뭔가를 한다는 것에 대한 뿌듯함도 있고.”     




― 지역아동센터, 작은 도서관에서 강의도 하시는데 인터뷰랑 강의는 또 다른 일이잖아요.

“가르치는 거 잘해, 관종이잖아. 모두 날 보고 있잖아. 하하. 잘할 수 있는 이유는 남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아이들이 해내는 걸 보는 것도 나름 성취감이 있더라고. 그래서 뿌듯해.”          




'무계기행' 강의를 하고 있는 예린과 집중하고 있는 아이들.      인스타그램 갈무리


내가 사는 동네, 나아가 아이들이 살기 편한 세상이 됐으면 하는 선한 마음      


― 작가이면서 오마이뉴스 기자로도 활동하시던데요?

지역에도 사람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 하하. 여전히 기자이시네요.

“놓을 수 없는 게 사소한 문제들이 눈에 띄는 거지. 예를 들면 아파트 공중화장실 세면대에 계단이 없으니 아이들 스스로 손을 씻을 수 없어. 유아 변기도 없어서 늘 부모의 도움이 필요한 거야. 근데 아이들은 3살만 돼도 혼자 해내면서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 하거든? 그런데 어른들이 눈높이를 맞춰주지 않아 기회를 박탈당한 거잖아. 이런 건 입주민으로서 관리사무소에 요청할 수 있는 사항이니 목소리를 내지.”     




기자 정신이 떠나갔다고 했지만, 여전히 기사를 쓰는 중.   오마이뉴스 기사 캡쳐





― 기자와 작가, 사람들이 어떻게 불러줄 때 가장 좋아요?

“작가가 좋아. 기자 정신은 사실 많이 떠나갔지. 물론 세상이 조금 더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은 항상 있기에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일들, 사소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내가 발붙이고 사는 동네가 더 나아졌으면 해.”     




― 지역에서 목소리를 꾸준히 내는 것도 의미 있는 것 같아요.

꾸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결국 내 아이가 살아야 하는 곳이니까. 아이가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았으면 하는 부모마음이자 넓게 보면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감과 죄책감이지. 우리는 어릴 때 자연을 많이 누렸잖아. 얼마 전 둘째 아이가 언제 코로나가 끝나는지 묻더라. 나는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어. 적어도 이곳에서 내가 사는 공간을 소중하게 아끼고 사랑해야지.”     




선배의 귀염둥이 두 아가들.  인스타그램  갈무리



― 선배님은 어떤 어른이 되고 싶어요?

“고등학교 선생님 약속을 지키려고 하는 어른이었어. 그리고 사과할 줄 아는 어른이었지.  내가 본 어른들은 항상 호통치기만 했는데 선생님은 아이들 앞에서 경쟁 사회, 계급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하셨어. 그 모습이 되게 충격적이었거든. 나는 적어도 내가 한 말에 있어서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어른, 그리고 어린 사람들한테도 내가 잘못했으면 사과할 줄 아는 어른될래.”      



― 일하지 않을 때는 주로 뭘 하세요?

“일에서 벗어난 시간에는 책을 제일 많이 읽어. 읽고 생각할 수 있는 책. 요리하는 것도 좋아. 요리하면 생각이 없어지거든. 만족스러운 맛이 나왔을 때 맛있게 잘 먹는 내가 좋아. 아들이 잘 먹어주면 더 좋고. 산책 많이 .”     




― 최근에 가장 크게 행복을 느꼈던 때가 있어요?

“아이들 어린이집에 보내 놓고, 청소 싹 해놓고 좋아하는 향 피워서 노래 들을 때. 온전히 혼자에 집중할 수 있을 때인 것 같네. 또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공감해 줄 때.”          




변덕 심하고 실증도 잘 내지만,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 핵심 질문이에요. 선배님이 저를 처음 마주했을 때가 기억나세요?

“첫 통화였는데, 네가 김해뉴스 입사하고 싶다고 했을 때. 내가 널 회사에 소개해 줘도 될 사람인지 알아야 하니 이것저것 물어봤을 것 아니야? 근데 네가 당황해했지.”     




― 엄청 무서웠거든요.

“다들 그렇게 본다.”   



  

― 저는 어떤 사람인 것 같아요?

앓는 소리 많이 하는데 오기로 버티지.”    



 

― 제가 앓는 소리 하는 사람이 특정되어 있어요. 오늘도 2년 만에 보는데 선배 얼굴 보자마자 다 쏟아냈잖아요. 스스로 깜짝 놀랐어요. 정말 오랜만에 보는 선배한테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선배는 왜 아무 말 없이 다 받아주고 있지.

“언제든지 해도 돼. 내가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면  기꺼이 그 역할이라도. 여하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기로 잘 버티고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게 미진이지.”     




― 좋은 말인 것 같아요. 녹음 잘 되고 있으려나.

변덕 심하고 실증도 잘 내지만.”     




― 어머, 끈기도 부족한 것 같아요.

“그게 나야. 그래서 올해 좌우명처럼 실천하는 게 ‘꾸준히 잘하기’거든. 나도 실증 잘 내고 변덕 심하고 한 달만 지나면 재미가 없어. 뭔가 꾸준히 잘해보기 위해서 지금 달리기를 시작해서 3주간 해보고 있어.”     




― 제가 딴짓을 많이 하는데 이 프로젝트는 하면 할수록 재미있고 친구들에게서 에너지도 얻어요.

“나도 김해 문화인물 사업하면서 너무 즐거운 거야. 갈 때마다 항상 힘을 얻고 온 기분이었지. 이런 세계도 있구나, 이 사람은 무언가를 성취했구나, 꾸준함에 대한 존경심도 들었고.”     




― 혼자여서 외롭지는 않요?

“개인적인 생각으론 스스로 충분히 해낼 수 있으면 혼자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해. 난 이게 더 잘 맞는 사람이기도 하고. 최근에는 회사에서 나온 친구들과 예술단체를 하나 만들었어.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생각하고 방향을 잡아나가기로 했지.”      




― 우와. 너무 재밌겠는데요. 프리워커들이 모이다니.

“내 일은 일대로 하고 마음 맞으면 같이 하는 거지. 신랑이 항상 나 보고 그러거든. “참 하고 싶은 게 많네.” 미진아, 그래야 좀 재밌지 않겠니? 나는 10년 안에 해보고 싶은 것들을 다 적어놨어. 올해 못하면 내년에 기회가 올 수 있잖아? 이미 3개는 이뤘어. 이렇게 10년 계획을 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내가 무엇을 지향하고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즐길 수 있고 재미있는 일들을 하나씩 해보는 거지. 너도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라. 걱정하지 마. 얼마든지 먹고살 수 있어. 진짜 얼마든지. 뭘 하든 할 수 있다.”     









신문사 생활은 나에게 힘듦과 성취, 우울과 기쁨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그래도 상사를 존경했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선배들이 있었기에 힘을 냈다. 예린 선배는 그런 나에게 "쑥쑥 커라"고 자주 말해줬다. 선배는 성장에 목말라있던 나에게 당신의 어머니처럼, 선생님처럼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었다.


두 아이의 엄마이자 작가로서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김예린. 늘 응원해주고 싶은 선배이자 언니, 그리고 소중한 친구다. 얼마 전 선배는 내게 생생한 일상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림책 <살아 있다는 건>을 선물로 보내왔는데, 함께 동봉된 짧은 편지 속 내 눈에 들어온  문장을 남겨본다.



슬프거나 힘들 때는 언제든 전화해. 선배가 다 들어줄 테니.




선배, 전화해도 되죠?



선배와 나의 교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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