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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율맘 Aug 28. 2022

오늘도, 끄적임

기록의 즐거움

  

  ‘끄적임’ 하면 낙서, 메모, 기록, 다이어리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끄적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은 바로 다이어리다.    

 

  다이어리를 고를 때 나만의 원칙이 있다. 디자인은 단순하고 가격은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크기는 A5보다 작은 것, 다이어리를 펼쳤을 때 가운데가 쫙 펴지는 것. 그래야 글쓰기가 편하니까. 월간 달력은 여유 있게 한 달이 더 있으면 좋고 첫 주의 시작은 일요일이어야 한다. 계획표는 다음 달로 연결이 되지 않고 그달에 마무리를 지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매달, 매주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으니까.      


  매년 다이어리와 펜을 고르는 일은 나에게 작은 기쁨이었다. ‘어떤 펜을 사야 더 예쁘게 다이어리에 쓸 수 있을까?’ , ‘올해는 표지를 무슨 색으로 골라볼까?’ 한 달 여유 있는 다이어리를 고르면 사자마자 바로 기록할지, 새해를 기다려 1월부터 기록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새로 산 다이어리에 첫 장을 기록하는 각오가 남다르다. 매번 같은 다짐이라도 적다 보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이 난다. 다이어리에 계획도 세워보고 목표를 이룬 모습도 상상한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머릿속을 정리하다 보면 방법을 찾기도 한다. 한 해 동안 수고했던 나의 흔적을 보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다시 시작한다.     


 어린 시절에는 방학 숙제로 일기 쓰기가 있었다. 방학 기간에 숙제로 낸 일기 쓰기는 밀리기 일쑤였다. 밀린 일기를 쓸 때면 지난날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머리를 쥐어짜는 날도 있고 어떤 날은 제목만 미리 써두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지난 일이 기억이 나지 않아 이야기를 지어내어 쓰기도 했다.     


 어른이 되어 다시 읽어보는 나의 어린 시절 일기는 재밌다. 사소한 일에 즐거워하기도 하고 별일 아닌 일에 진지하기도 했다. 내가 기억하는 초등학교 시절의 마음과 일기에서 표현돼 마음이 달라서 놀라기도 했다. 기억의 왜곡! 20년 넘게 같이 산 언니가 ‘한 사건인데 너의 기억과 나의 기억은 다르다.’라는 말과 차영민 작가님이 지금 떠오르는 일, 생각을 기록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잊혀서 이야기가 다르게 기억되기도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이렇게 말했던가요? 수업시간에 했던 말인데…. 크크) 그날그날 떠오르는 생각이나 있었던 일을 미루지 않고 바로 기록으로 남겨두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느꼈다. 어릴 적 일기를 보며 어떤 때는 꽤 진지했던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 지금 아이들 마음도 헤아릴 수 있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교환일기’라는 것이 유행했다. 노트 하나를 정해서 편지를 주고받는 방식이다. 이때도 노트를 얼마나 신중하게 골랐는지 순수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웃음이 난다. 좋아하는 남자 친구와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확인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사랑보다 진한 우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사춘기 시절 친구가 좋아서 글씨체도 따라 쓰고 행동도 따라 하며 닮아갔다. 

 ‘그땐 그랬지.’      

 고등학교 시절에는 계획하고 상상하길 좋아해서 공부 계획을 수시로 세웠다. 대학교 시절에는 친구들과 수업이 끝나면 무엇을 하면서 놀 것인지 계획을 세우기에 바빴다.      


 나는 그렇게 계획하기를 좋아하고 무엇이든 메모하고 끄적이는 것을 좋아하는 어른으로 자랐다. 나의 기록에 대한 열정은 직장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 절정이었다. 하고 싶은 게 많은 첫 사회생활, 영어 공부하기, 전공 서적 공부하기, 수영 등등 새해 목표뿐만 아니라 내가 아는 모든 이의 생일과 각종 행사를 연간 계획표에 적었다. 그리고 월, 주, 일 계획표를 꽉 채웠다. 색깔을 바꿔가며 적기도 하고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 중요한 일정에 형광펜과 별표도 잊지 않았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도 다이어리 구매는 계속했지만, 끝까지 채우지 못했다. 세상 중심이 내가 아닌 아이들 위주로 돌아갔다. 어린아이들을 돌보며 따로 시간을 내서 다이어리를 슬 에너지가 없었다. 다이어리 꾸미기의 즐거움이 사라지고 아이들을 돌보는데 에너지를 쏟았다. 예전처럼 다이어리를 구매하지는 않았지만, 계획과 상상을 좋아하는 나를 막을 수는 없었다. 다이어리 대신 눈에 보이는 종이에 공백만 있으면 아무렇게나 휘갈기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다이어리 소유욕이 사라진 어느 날 언니가 선물인 듯 선물 아닌 다이어리를 선물했다. 언니가 쓰려고 샀는데 본인과 잘 맞지 않는다고 했다. 언니가 선택한 다이어리의 크기는 A5 크기로 내가 원래 사용하던 크기의 다이어리보다 조금 컸다. 크기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카키색 가죽 덮개가 마음에 들었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팔로우를 하는 정리 인플루언서도 사용하는 다이어리라서 더욱더 마음이 갔다. 다이어리에 대해 검색해보니 특허로 등록되어있는 ‘3P 바인더’로 시간 관리를 철저히 할 수 있도록 만든 다이어리다. 시간 관리뿐만 아니라 목표관리, 독서 관리, 재정관리, 인맥 관리 등 체계적이었다.  그런데 언니가 구매한 다이어리 속지는 나의 다이어리 선택 원칙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언니, 다이어리에 월간 계획표가 없어!”

 “응, 따로 살 수 있는데 나한테는 필요가 없어서 안 샀어.”


  주간 계획표는 내가 알고 있던 서식과 조금 달랐다.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동영상도 찾아봤다.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는 내가 이렇게 공부까지 하면서 써야 할 일인가 싶었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데는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을 바꾸고 잘 활용하면 시간 관리도 되고 여유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제대로 써보자.’


 동영상에 나온 다이어리 작성법에 맞춰 내가 원래 계획했던 일과 실행한 일을 겹쳐서 썼다. 할 일을 기록할 때도 우선순위를 두고 상단에는 사적인 일을 위에서 아래로, 하단에는 공적인 일을 아래에서 위로 기록하는 방식이다. 하루 이틀은 내가 계획한 대로 실천했다. 시간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은 나에게 조금은 잘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기록은 오래가지 못했다. 처음부터 내가 원하는 속지로 채워지지 않은 다이어리라 그런 것도 있지만 바로바로 스마트폰에 기록하는 일이 익숙해져 있던 나는 출퇴근할 때 뺐다 넣는 동작만 반복하는  쓸모없는 물건이 되었다.     


 과거에는 수기로 작성하는 기록이 소중했다. 더 예뻐 보이려고 다양한 글씨체를 연습해가며 다이어리를 꾸몄던 지난날에 미소가 번진다. 집안 정리와 물건 정리에 빠진 요즘, 다이어리도 함께 비웠다. 소중한 기록은 일부만 낱장으로 남겨 보관하거나 사진으로 찍어뒀다. 최근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볼 수 있도록 블로그에 기록으로 남겨둔다. 끄적임의 즐거움이 시대에 맞춰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아날로그 끄적임이 좋다.     


 조만간 여유를 갖고 ‘3P바인더’ 다이어리에도 끄적이는 날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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