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음악과 술
흠결 없고 연약한 것들을 떠올린다. 어린아이의 뽀얀 이마, 보드라운 솜털, 둥지 안의 어린 새, 흙을 이기고 나온 여린 새싹, 오븐에서 갓 구워낸 빵, 얇고 투명한 크리스털 잔, 햇볕에 말린 하얀 시트, 청결한 비누 냄새,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따뜻한 원고, 눈 덮인 호수, 새벽의 고요, 파르라니 핏줄이 비치는 얇은 손목, 만개한 벚꽃, 교과서 같은 비행, 완벽한 연주, 온전한 슬픔, 당신을 향해서만 열린 마음과 순수한 갈망 같은 것.
지키려 하면 예민해지고 겁이 많아져서 도저히 뗄 수 없는 한 발짝. 그래서 차라리 포기해버리고 싶은 1초. 돌이킬 수 없을 바에야 온몸을 던져 흠뻑 젖어버려야 마음 편한 순간들. 어쩌면 애초에 설계가 잘못된 날들.
무수한 분초와 감정과 세계로부터 절실하게 안전거리가 필요할 때 나는 듣는다.
결벽하게 아끼던 것들이 내 안에서 그 빛을 잃을 때 마우리치오 폴리니(Maurizio Pollini)가 연주한 쇼팽 에튀드를 듣는다. 추격이라 이름 붙은 “Étude Op. 10, No. 4 in C♯ minor”, 혁명이라 이름 붙은 “Étude Op. 10, No. 12 in C♯ minor”를 연이어 들으면, 격렬하게 모든 걸 부수고 태운 뒤에 비통해하며 그 잔해 위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스스로의 존재와 기척마저 거추장스러워 그냥 이대로 사라져 버리고 싶은 날 메이지 스타(Mazzy Star)의 “Fade Into You”, 데미안 라이스(Damien Rice)의 “The Blower's Daughter”, 벤 폴즈(Ben Folds)의 “Still Fighting It”, 밥 딜런(Bob Dylan)의 “Knockin' On Heaven's Door”를 듣는다.
비가 오는 날은 노라 존스(Norah Jones)나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를 듣는다. 노라 존스의 곡 중에서는 "The Long Day Is Over",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곡 중에서는 "Stronger Than Me"를 각별히 아낀다. 매력적인 보컬의 음색과 재즈풍 리듬에 귀를 기울이면, 눅눅하게 젖은 옷자락이나 발끝, 버스 창가에 맺힌 빗방울, 비를 맞아 선명해진 색채나 소리의 파장이 모두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같아진다.
집안일을 하기가 귀찮을 때는 레지나 스펙터(Regina Spektor)의 노래를 듣는다. 요리를 할 때 “The Calculation”을 들으면 어쩐지 칼질이 더 경쾌해지고, 청소를 할 때 “Us”를 들으면 움직임이 조금 더 부산해진다.
질서가 필요할 때는 글렌 굴드(Glenn Gould)가 연주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The Goldberg Variations)을 듣는다. 새로 번역 작업을 시작할 때 들으면, 마치 글렌 굴드의 결벽한 영혼이 옮아오기라도 한 듯 한 글자 한 글자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출근길에는 센티멘탈 시너리의 “Brand New Life”, 차가운 도시 여자가 되고 싶은 날은 마치 위악을 부리는 듯한 신디 로퍼(Cyndi Lauper)의 “Echo”나 “High and Mighty”, 퇴근길에는 라디오헤드(Radiohead)의 OK Computer 앨범이나 이소라 7집 앨범을 듣는다.
잠이 오지 않을 때는 백건우가 연주한 쇼팽의 야상곡 “Nocturne Op. 9, No. 1 in B-flat minor”이나 예브게니 키신(Evgeny Kissin)이 협연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Piano Concerto No.2 Op.18”을 듣는다.
청각에 정신이 분산되면 날이 섰던 신경이 조금 누그러진다. 근사한 술 한 잔, 따뜻한 차 한 잔도 음악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생각해보면 늘 날씨 때문에 말썽이 생겼다.
포르투갈의 나자레(Nazaré)라 하는 바닷가 마을에 당일치기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당연히 있겠거니 생각하고 버스 시간을 알아보지 않은 것이 패착이었다. 느긋하게 돌아다니다가 마을에서 나가는 막차를 놓쳤다. 숙소야 당연히 없었고 날씨마저 험악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비를 피할 겸 근처 카페에 들어가서 진한 핫초코 한 잔을 시켰다. 느리게 핫초코를 비우며 그 날 산 엽서에 친구들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지금 나는 혼자이고, 바다는 사납고, 비가 오지만,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나는 아주 따뜻하고 달콤한 핫초코를 마시고 있다. 그런 인식이 평화를 주었다. 옆 테이블에 앉아 계시던 분들께 여기 사시냐 묻고 사정을 설명했다. 한 분이 발 벗고 나서서 함께 주변을 돌아다니며 숙소를 찾아주셨다. 숙소는 빈말로도 아주 좋은 곳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함과 안도감에 눈물이 났다. 작은 창이 밤새 바람에 흔들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소등을 하니 손을 들어 코 앞에서 흔들어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둠이 깊었다. 그 밤 나자레는 나에게 세상의 끝으로 기억되었다. 다음 날 아침 거짓말처럼 바다가 잔잔하고 시야가 맑았다. 전날 세계가 끝나는 줄 알았다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평화로움이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공항에서 엄마와 이모를 만나기로 했던 겨울에도 날씨가 문제였다. 이상기후로 유럽 전역에 폭설이 내려 비행기가 줄줄이 연착되었다. 나는 리스본에서 출발해서 마드리드를 경유해 바르셀로나로 향하는 일정이었고, 엄마와 이모는 한국에서 출발해 암스테르담을 경유해 바르셀로나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내가 마드리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바르셀로나로 가는 비행 편을 놓친 뒤였다. 엄마와 이모는 아직 비행 중인지 연락도 되지 않았다. 발을 동동 구르며 바르셀로나로 가는 가장 가까운 비행기표를 구했다. 출발 시간이 실시간으로 바뀌었고, 게이트도 정해지지 않았다. 예정대로였다면, 엄마와 이모가 이미 바르셀로나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닿지 않는 연락을 포기하고 공항 내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맥주 한 잔을 시켰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니 그제야 주변이 보였다. 늘씬하니 키가 큰 스페인 사람들의 생김새나 여행가방을 끌고 바삐 걸음을 재촉하는 모양새나 배낭을 내려놓고 바닥에 주저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그건 내가 아는 익숙한 공항의 모습이었다. 맥주로 인해 누그러진 신경과 공항의 일상성에 평정심이 돌아왔다. 할 수 없지 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인 걸. 먼저 도착해서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을 엄마와 이모의 모습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웠다. 결과적으로, 암스테르담에서 발이 묶여 있던 두 분이 바르셀로나 공항에 나보다 훨씬 늦게 도착하셨다. 긴 비행에 지친 두 분과 마음고생에 지친 내게는 따뜻한 샤워와 포근한 잠자리가 무엇보다 절실했다. 다만 유럽이 예외적으로 추운 해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난방이 필요치 않았던 나라에는 라디에이터 외에 추위를 몰아낼 다른 수단이 없는 듯했다. 불행히도 라디에이터로는 방안이 충분히 데워지지 않았다. 오들오들 떨던 우리 셋은 체온이라도 나눠보려 결국 한 침대에 꼭 붙어서 잤다. 그게 또 색다르고 재미있어서 웃음이 터졌던 것 같다. 우리 조난당한 사람들 같지 않니. 내 자리는 엄마와 이모 사이였다. 다음 날 아침 두 분이 너는 무슨 꿈을 꾸기에 자다가 자꾸 웃냐고 하셨다. 어, 그냥 행복해서. 엄마랑 이모가 여기에 있는 게 너무 행복해!
뉴욕에 살 때도 종종 변덕스러운 날씨에 습격을 당하곤 했다. 건축 양식 자체가 예술인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기획전을 관람한 뒤 설렁설렁 걸어서 역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예고 없이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역으로 뛰거나 비를 피하려 가까운 차양 아래로 숨어들었다. 주변을 살폈다. 빨간 차양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끌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프렌치 비스트로였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책을 읽으며 비가 좀 잦아들기를 기다릴 요량으로 와인 한 잔과 가벼운 후식을 시켰다. 서빙을 하시는 분은 나를 관광객으로 본 모양이었다. 당시 나는 그 도시에 살고 있었지만, 그저 길게 머무는 여행객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어 오해를 정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야말로 관광객다운 대화를 나누었다.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할 것인지, 무엇을 하면 좋을지. 그는 'Enjoy your vacation' 정도의 말로 대화를 마무리한 후 불편한 것이 없는지 가끔 살피는 것 외엔 그저 내가 홀로 와인을 즐기고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묘하게도 그날 어떤 그림을 보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행의 변수가 만들어 낸 틈새의 시간만이 오래 마음이 남았다.
지나간 여행이 그리울 땐 내시(gnash)의 "First Day of My Life"가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