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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mi Aug 28. 2018

건망증도 심하면 병인가요

망각 곡선을 거스르는 자

사소한 걸 잘 잊어버린다. 숫자, 주소, 고유명사,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안경을 쓰고 안경을 찾거나, 우산을 쥐고 우산을 찾는다. 약속을 해놓고 약속을 잊거나, 예약을 해놓고 예약을 잊는다. 일주일 넘게 책 한 권을 찾아 온 집안을 다 뒤졌다. 한낮에 번뜩, 그 책을 예전 남자 친구에게 빌려주었단 게 떠올랐다.


이제는 돌려받을 수 없게 된 책이야 좀 애석하고 말 일이지만, 바람을 맞힌 격이 되어 친구의 감정을 상하게 하거나, 주위에 폐를 끼치는 것이 문제다.


애초에 제대로 기억을 하지 못한 것인가, 보관과 유지에 문제가 있었던 것인가, 상기에 실패한 것인가 원인을 찾아봐도 무용하다.


핸드폰을 잃어버리고 다니는 일은 다반사다. 아직 세종에 살았을 적 부모님을 뵈러 집으로 올라왔다 내려가는 날 모바일 KTX 앱으로 표를 샀다. 서둘러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탓에 이르게 출발해서, 열차 탑승 시간보다 40분쯤 일찍 역에 도착했다. 커피도 사 마시고 책도 읽다가 여유 있게 승강장으로 내려갔다. 몇 호 차였지 생각하면서 가방을 뒤지다가 그제야 핸드폰을 놓고 왔단 걸 깨달았다. 모바일로 발권한 좌석번호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이쯤에서 당황스러웠어야 마땅한데, 스스로도 의아할 정도로 마음이 차분했다. 승무원이 지나가면 물어볼 요량으로 일단 탑승해서 열차의 중간 즈음인 7호차 복도에서 대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움을 청할 수 있었고, 표값을 결제한 카드번호로 조회해서 무사히 좌석을 찾았다.


그리고 다음 주말까지 일주일을 휴대폰 없이 지냈다.


첫 이틀은 좀 불편했는데, 이후로는 오히려 없는 것이 더 편했다. 나의 사정에 아랑곳 않고 예고 없이 울려서 주의력을 갉아먹던 그 기계가 곁에 없으니 두통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답신을 주어야 한다는 부채감이 없어서인지 머릿속이 맑게 갰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런 감정을 ‘구속이나 억압, 부담 따위에서 벗어난 느낌’이라 정의한다. 해방감이었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에는 한 번에 한 가지 일만을 했고, 그 한 가지 일을 질릴 때까지 반복했던 것 같다. 상황은 더 이상 한 번에 한 가지 일만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래서 모든 일에 열의가 없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얼마간 호되게 아팠다. 하루 종일 내릴 수 없는 배에 탄 채 멀미에 시달리는 기분이었다. 하루 이틀 병가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서 억지로 출근했다. 어지럽고 메스꺼운 채로 종일을 버티는 날이 이어졌다. 내게 허락된 체력과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이런 날들이 나의 날들을 살라먹는다 생각하니 무척 억울했다.


오늘 아침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무리 애써봐도 전날 어떻게 퇴근을 했는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뭉텅 썰려나간 듯 오후의 어느 때인가부터 집에 도착할 때까지의 기억이 존재하지 않았다. 비이성적인 두려움을 누르려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가만히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일련의 행적이 서서히 빈 곳을 메우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기억이 돌아왔다. 체력과 감정에 부하가 걸리니 잃어도 무방할 기억부터 순식간에 사라진 듯했다. 망각이 심리적 방어기제라는 걸 이렇게 생생히 느낀 적이 또 있었나 싶다.


오직 스스로 남으려고 하는 회상만이 다른 여러 가지 회상에 대신하여 남겨질 권리를 갖는다.

슈테판 츠바이크 <어제의 세계>


잊힌 것에는 잊힐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귀중한 걸 잃고도 잃은 줄도 모를까봐 그것이 못내 겁이 난다. 따스하고 소중한 것, 작지만 중요한 일, 훗날 꺼내보면 힘이 되는 날들, 나를 나로서 온전하게 하는 기억, 애써 기억할 가치가 있는 회상들이 질기게 살아남아 남겨질 권리를 획득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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