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응. 여름이라서.
겨울의 초입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던 밤, 비닐우산을 적시던 투명한 가을비가 하얗고 연약한 눈송이로 변했다. 꼭 당신에게 직접 보여주고 싶은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당신을 만난 이래 나의 모든 세포는 바깥으로 열렸다. 세계는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모든 순간이 운명이 되었다. 그런 계절은 오로지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누군가에게로 향하는 길로만 규정된다. 그 해 겨울, 내가 목격한 세계는 모두 그에게 전하거나 전하지 못할 시가 되었다.
동화 속 해피엔딩을 믿었던 적이 있었다. 사람에게는 평생 정해진 몫의 불행이 있어서, 지금 나는 내 몫의 불행을 모두 소진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불행이나 행복 역시 각자에게 주어진 몫이 다르다. 불행 이후의 세계가 영원한 행복이라고 이제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불행이 할퀴고 간 자리에는 상흔이 남는다. 그런 흔적은 결코 풍화되거나 침식되지 않는다. 아픈 구석이 되어 이따금 자기주장을 하듯 내게서 세계를 유리시킨다.
언제부터 이렇게 잠을 못 주무셨어요? 어른이 되고나서부터는 잘 잔 기억이 없어요. 10년쯤 되었다는 소리인데 그러면 이제는 아예 습관이 되셨을 거예요. 너무 열심히 사는 게 습관이 되어서 잠도 열심히 주무시려고 애쓰는 것 같은데 잠은 그런 게 아닙니다. 저절로 오는 겁니다.
한계에 다다랐을 때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걸 가장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스스로가 정한 기준에 매여 쉬어도 될 때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 역시 나 자신이다. 더 노력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 결과와는 상관없이 몹시 자괴감이 든다. 자비와 타협이 없어, 실망만 는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멈춰야 할 지도 잘 모르겠다.
약만 처방해주면 되는데 왜 자꾸 이상한 질문을 해. 덩어리째 슬픔이 목으로 넘어오는 아슬한 기분을 느끼며 텅 빈 대답 대신 웃음을 택했다.
예리하게 벼려진 세포 하나하나가 당신을 향하던 계절은 끝이 났다. 하나의 연애가 지나갈 때마다 무언가를 잃어갔던 나는 이제 다음 사람에게 무엇을 내주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요즘 연애 안 해? 그건 참 사소한 질문이었는데 남루한 나의 방벽을 허물었다. 내가 지금 괜찮지가 않아. 그런데 이런 걸 누군가와 나눌 자신이 없어. 내가 지금 아주 허름하고 초라해서 왜 잠을 못 자냐는 말마저 추궁으로 들려. 화가 나야 마땅할 순간이 전부 슬퍼. 내뱉지 못할 말들 대신 계절 탓을 한다. 여름이라 그래.
그러나 연애마저 열심히 해야 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경험이 쌓일수록 예측은 정확해진다. 그건 연애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게 좋고 당신이 보고 싶어 허락된 모든 시간을 쏟던 날들을 지나 균열이 벌어지고 애정이 낡아서 간격은 메울 수 없는 것이 된다. 발단, 전개, 위기를 거쳐 절정에 오를 때보다 빠르게 추락할 결말을 생각하면 세상에 이렇게 많은 연인이 있다는 걸 믿을 수 없게 된다.
그러니까 그냥 괜찮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잠을 좀 못자도 괜찮고, 연애를 하지 않아도 괜찮아. 슬픔은 슬픔대로 놔두고, 화가 나면 화를 내도 돼. 너는 너로서 온전하니, 너무 애쓰지는 마. 나라도 나를 안아주고 싶은 날 굳이 말이 필요하다면 그건 오로지 “괜찮다” 한 마디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