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잡는 일꾼의 일상
종종 인류가 멸망한 세상을 상상한다. 물론 그 상상 속에서 나는 살아남아 텅 빈 세상을 마음껏 돌아다닌다. 혼자라 외로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몇몇이 남아 무리를 이루고 또 싸우고 다시 갈등하는 피로한 세상이 되는 것보다는 혼자가 났다. 혼자서 조금 더 살다, 나의 죽음과 함께 모든 인류가 끝나는 게 분명 더 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인류 멸망을 그린 작품들이 특히 더 기억에 남는다. 소설 『로드』나 영화 <나는 전설이다>, 게임으로는 단연 <라스트 오브 어스>가 떠오르는데 안타깝게도 그런 작품들이 그리는 멸망 후의 세상은 참혹하다. 기대했던 여유와 자유로움은 없고 먹기 위해 버둥거리고 죽지 않기 위해 버틴다.
더구나 대부분의 작품들은 인류멸망의 원인을 원인 모를 바이러스와 그로 인한 인류의 좀비화,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상황으로 설정한다. 그러니 유유자적할 시간이 없다. <데이즈 곤>의 주인공 디컨 세인트 존이 그렇다. 이건 멸망하기 전보다 더 바쁘고 더 힘들다.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인류가 멸망하고 살아남은 몇몇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산다. 그 무리들은 저마다의 생각과 방식으로 타인에게 호의적이기도 또는 모두를 적으로 돌리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은 모든 무리에서 벗어난 자유인의 몸으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아내를 찾으며 곳곳을 누빈다. 그러다 눈앞에 ‘좀비떼’를 만나면 사정없이 죽여 버린다.
그런데 그의 좀비 사냥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중 하나다. 사냥꾼이 돈을 벌기 위해 사슴을 잡는 것처럼 먹고살기 위한 '일'에 불과하다. 말 그대로 좀비 잡는 일꾼. 더구나 일을 잘하기까지 한 그는 좀처럼 쉴 틈이 없다. 고된 막노동에 얼굴은 피로에 찌들고 옷은 남루하여 연민을 느끼게 만든다.
다행히 주인공은 매우 실력이 좋다. 잘 싸운다. 게임 실력이 형편없어 나의 개떡 같은 조작에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좀비들을 해치운다. 시원시원한 타격감과 사격음에 쌓인 스트레스가 단숨에 사라진다. 물론 초반 빈약한 체력과 총, 서툰 플레이로 고전을 면치 못하지만 다행히 초반을 넘기면 해볼 만하고 중후반이 되면 좀비를 찾아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무리 지어 모여 있는 좀비떼를 보고 심장을 벌렁였던 때를 까맣게 잊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좀비들을 반갑게 맞이할 지경에 이른다.
다행히 게임의 전체 분량이 엄청나다. 지금껏 많은 게임을 하지는 못했지만 플레이타임이 가장 긴 게임이었다. 약 한 달 정도를 충분히 즐긴 것 같다. 지금은 그 아쉬움을 달래는 중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의 마음이 나와 같지는 않은 모양이다. 어느 게임보다 호불호가 강한 게임이다. 여러 번의 업데이트로 그 평가가 긍정적으로 바뀌는 중이긴 하지만 초반에는 불호가 훨씬 많았다. 대부분의 비판은 버그와 늦은 로딩, 불편한 이동 때문이었다. 물론 실제로 조금 이상하고 불편한 부분들이 있었지만 그렇게 욕을 먹어야 할 만큼 치명적 문제들이라고는 생각되지는 않는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보다 완벽한 상품을 원하는 거야 당연하겠지만 이렇게나 혹독한 평가는 수년을 고생한 제작자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어쨌든 업데이트를 거쳐 이제는 꽤 할 만한 게임이 되었다니 다행이긴 하다.
이제 다음 게임을 찾아야 한다. 다음 작품은 좀 더 평화로운 세상을 배경으로 했으면 좋겠다. 이런 건 어떨까? 인류 멸망 후 유유자적 못 가본 세상을 돌아다니는 배낭여행 게임. 텅 빈 북한을 지나 중국을 거쳐, 유럽까지 갈 수 있다면 좋겠다. 그 먼 길을 천천히 걸으며 또 때로는 버려진 차를 타고 달리며 텅 빈 세상을 만끽하는 거다.
여행을 갈 수 없는 요즘 그런 바람은 더욱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