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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태진 Jan 19. 2024

조금씩 멀어져 가는

애프터썬

  친하게 지내던 형이 있다. 관계사 담당자로 만났던 형을 오래 알고 지냈던 건 아니지만 함께 일하는 동안 다양한 일들을 하며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물론 그 형도 나와 친한 사이였다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랬다. 그렇게 일 년 정도를 함께 일하다 회사를 그만두며 멀어지게 된 형은 이후에도 종종 식사와 술자리를 가지며 관계를 이어갔다. 그런데 또다시 수년의 시간이 흘러 조금씩 연락이 뜸해지고, 그렇게 옅어지던 관계가 희미해져 갔다. 물론 여전히 좋은 감정이고 다시 만나면 즐거울 테지만 다시 만날 기회도, 연락할 핑계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그저 안부를 묻는 것 역시 한두 번이지, 그 이상은 왠지 어색해져 버린 거다.      

  인간관계는 유한하다. 심지어 가족일지라도 그 끈끈했던 관계는 옅어지고 얇아질 수밖에 없다. 각자의 삶이 팍팍해서 멀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그냥 뜨겁던 열정이 식어서인 경우가 더 많다. 매일 붙어 있는 사람들도 그 관계가 조금씩 멀어지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몸까지 멀어진 경우에는 그 어떤 관계도 멀어질 수밖에 없다.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누군가와의 관계가 조금씩 옅어져 간다는 것을 느끼고 인정할 때 표현하기 힘든 슬픔과 허무함을 경험한다. 한때 요란했던 나의 표현과 상대에 대한 애틋함이 이렇게나 약하고 유한했던 것이라는 사실이 왠지 멋쩍고 씁쓸해서다. 결국 나도 세상이 말하던 흔한 어른,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성장해 가는 딸과 아빠의 관계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 부모의 울타리에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훌쩍 성장하여 이제 그 밖으로 나가려는 딸. 본능적으로 전진하는 딸은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 자신의 인생과 삶이 바빠 주위를 돌아볼 겨를이 없는 딸은 자신의 변화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반면 아빠는 속절없이 멀어져 가는 딸을 바라볼 뿐이다. 양쪽으로 팽팽하던 관계의 끈이 어느새 한쪽이 느슨해져 바닥으로 축 처져버렸다. 

  카메라에 담긴 20년 전의 아빠와 나. 영화 <애프터썬>에서의 딸 소피는 이제 카메라 속 서른 초반의 아빠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또래의 친구로서 보는 아빠의 모습은 기억 속의 아빠와 많이 다르다. 그 당시 이해할 수 없었던, 이해할 필요가 없었던 아빠의 행동과 표정이 이제는 충분히 이해되고 온전히 느껴진다. 은연중에 느껴지던 쓸쓸함이 아빠의 외로움과 아픔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아빠의 현실과 대비되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한여름의 여행은 그래서 더 눈물겹다. 사랑하는 딸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어색한 아빠. 더구나 사춘기가 되어 조금씩 변해가는 딸을 보며 촉각을 곤두세우며 노력 중이다. 반면 모든 것이 새롭고 호기심 가득한 딸은 낯선 공간, 아름다운 풍경, 관심 가는 사람들의 존재만으로 매 순간 설레고 즐겁다. 더구나 오랜만에 만나 더욱 반가운 아빠의 존재까지, 딸에게 더없이 행복한 휴가인 거다. 

  하지만 아빠는 왠지 모를 슬픔에 잠겨 있다. 딸 앞에서 애써 밝음을 유지하려 하지만 감출 수 없는 슬픔이 드러나고 남몰래 흘리는 눈물은 불행을 암시한다. 영화 속에서 20년 후 아빠의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건강하게 살아있는지 혹은 병이나 다른 사건으로 죽음을 맞이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지만 영화 속 현재의 분위기는 왠지 어둡다. 

  영화는 외롭고 힘든 아빠와 이제 막 젊음이 펼쳐진 딸은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만들어지는 간극을 잘 보여준다. 그 미묘한 감정선이 아름다운 풍경과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요란하지 않은 부녀의 휴식에 어울려 덩달아 차분해진다. 


  

  필연적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부모와 자식은 조금씩 멀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서 멀어진다는 것은 자식의 자유로운 성장을 위해 조금 물러난다는 이야기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부모가 자식에게 품는 아픈 속마음인지 모르겠다. 

  그저 살아가는 것도 여전히 서툰데, 부모의 자리 역시 매일이 도전이고 어렵다. 비단 자식뿐이랴.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다들 누군가에게 다가가길 바라고, 의지하고 위로받기를 원하지만, 천천히 멀어지는 사람이 생기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서운한 또는 아쉬운 사람이 될 수 있다.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고 또 상처 주고 싶지 않은 삶을 살고 싶지만 우리의 삶과 관계는 유한하기에 그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 모두를 만족시키는 완벽한 소통은 없다. 그러니 있지도 않은 애꿎은 정답을 찾기 위해 애쓰지 않아야 한다.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 말이다. 나의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상대가 알아주지 못하면 또 어때 라는 마음이 필요하다. 어찌 되었건 내가 상대를 위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까. 어떻게든 표현하는 것도 나고 표현하지 못하고 혼자 마음속에 담는 것 역시 나이다. 그런 나를 받아들이는 것 또한 나의 몫이고.

  멀어지는 것도 멀어지다 다시 가까워지는 것도, 그 자체로 인연의 몫이라 생각하자면 너무 뻔한, 낡고 낡은 대답일 뿐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언제나 예측불가였고 그래서 인간적이다.


  좁아지는 것 같은 인간관계를 돌아보며 느낀 부채감에 변명이 길었다. 그냥 내키는 대로, 내 멋대로 살고 싶다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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