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 지니- 정유정
어둠이 찾아왔다.
이 책의 끝은 이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우리는 언젠가 어둠을 마주한다. 죽음을 마주한다. 작가 정유정은 작가의 말에서 죽음에 대해 이렇게 사유한다.
모든 위험을 받아들이면서 삶을 총체로서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단지 ‘무’로 만들지 않는 길이다. 그것이 죽음의 의미인 것이다.
이 책은 묻는다. 우리가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이건 곧 자연의 흐름에 동화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묻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 생(生)에 욕심이 많은 편이다. 아직 못해본 것들과 모르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이건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지적 능력과 상상력이 뛰어난 ‘인간’이라는 종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산다는 것에 욕심을 가질 것이다. 당장의 발전을 위해 하늘로 아등바등 올라가는 초고층 건물과 과학 기술을 보자. 더 알고 싶은, 더 갈망하는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지구를 바꿔놓았다.
하지만 애석한 점은, 그러한 우리의 마음이 지구와 부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더 많이’를 외치는 인간의 마음은 오존층에 구멍을 내고 대지를 물에 잠기게 했고, 바다를 오염시켰다. 덕분에 수많은 동식물들은 멸종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책은 우리에게 묻는다. 만일 인간이 사라짐으로써 멸종 위기에 처한 모든 동식물들이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영장류 센터에서 근무하는 연구원 ‘이진이’는 동물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어느 날, 화재로 인해 멸종위기종 ‘보노보’가 위협에 처했고 이진이는 보노보를 구하기 위해 현장에 투입된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그녀는 의식을 잃게 되고, 다시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이 보노보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본래의 ‘나’를 되찾기 위해 방랑자 ‘민주’와 함께 여정을 떠난다.
민주는 수동적인 태도가 몸에 밴 사람으로, 사회에서도 집에서도 인정받지 못해 떠돌이 생활을 한다. 그는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자살 명소’를 찾아다니며 무의미한 시간들을 연명한다. 언제 죽을까 생각하며 방황하던 중 그는 ‘이진이’를 만난다. 정확히 말하면, 보노보가 된 이진이를 만난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그는 마지막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진이의 ‘나 찾아 떠나기’ 여정에 동참한다.
여정의 끝에서 발견한 이진이의 ‘본체’는 죽음의 문턱에 놓여 있었다. 즉 이진이가 살기 위해 ‘보노보’의 몸에 남아있기로 한다면 보노보의 본래 주인인 ‘지니’의 의식은 사라질 터였고, 이진이가 본체의 몸으로 되돌아간다면 그녀는 죽을 터였다. 그녀는 죄 없는 보노보 ‘지니’가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그녀의 결정이 오로지 이타심에서 비롯되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 그녀의 결정에는 죄책감이 상당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욕심이 많은 우리가 삶의 터전에서 너희들을 쫓아냈다는, 그래서 보노보 ‘지니’의 의식을 쫓아내고 자신이 보노보의 몸으로 삶을 계속 영위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그런 죄책감. 그래서 그녀는 희생한 것이다. 지구를 병들게 한 인류가 응당 치러야 할 업보를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그런 그녀의 곁에 민주가 없었다면 그녀는 죽음이라는 여정의 끝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동적인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는 민주에게는 타인의 생각과 의견을 존중해주는 성숙한 마음이 있었기에, 죽음을 선택한 진이를 이해하고 응원해 줄 수 있었다. 덕분에 진이는 생과 사의 경계에서 갈등할 때마다 민주의 응원을 통해 스스로의 선택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민주 역시 모험하면서 생(生)을 향한 진이의 치열한 몸부림을 보았기에, 잃어버렸던 삶의 목표에 다시 의미를 부여해 세상으로 한 걸음 내딛는다. 운명을 선택함에 있어 진이와 민주는 서로에게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녀는 내게 삶이 죽음의 반대말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삶은 유예된 죽음이라는 진실을 일깨웠다. 내게 허락된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 영원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르쳤다. 그때가 올 때까지, 나는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삶을 가진 자에게 내려진 운명의 명령이었다.
어둠이 찾아온다. 우리가 경각심 없이 살아간다면 더 많은 생명들이 죽어나갈 것이다. 우리가 사라짐으로써 동식물들이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기꺼이 죽을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난 여전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것이다. 죄 없는 타인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만큼 성숙하진 않은 것 같다. 아직은 그정도로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지금의 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고, 싫어하는 것도 많고, 가끔씩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하는 보통의 사람이니까.
하지만 내가 이 책을 통해 배운게 있다면, 내가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이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겠다는 점이다. 언젠가 모두 죽음이라는 허무와 마주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허무 속에서 주어진 삶과 역할을 치열하게 살아내겠다는 의지는 타인의 마음에 불을 지필 수 있다. 그러한 의지를 가진 사람을 두 눈으로 직접 본다면, 아마 내 마음에도 불이 피어오를 것이다. 용기란 ‘불가능’을 극복하는 일이니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것만큼 놀라운 일은 없으니까.
치열하게 살아가는 일은 결코 허무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언젠가는 소멸할 테지만, 우리가 피땀흘려 일궈낸 성과들도 언젠가는 빛바랠 테지만, 시절의 감정들은 언제나 우리 마음 속에 남아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처럼.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몽글해지는 것처럼.
기독교를 믿진 않지만, 성경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다. “세상 모든 짐들을 내려놓고, 내 짐을 져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천국에 가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과 같다고 한다. 천국에 가기 위해선 짐을 버려야 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천국에 가기 위해 버려야 할 짐들이 있고, 지녀야 할 짐들이 있다. 삶이 끝나고 어둠을 맞이할 때 우리는 부와 명예, 관계 등 실존의 짐들을 모두 내려놓는다. 사실 이러한 짐들은 우리가 살면서도 언제든지 내려놓을 수 있다. 하지만 생각과 감정은 우리가 내려놓을 수 없는 것들이다. 분홍 코끼리를 상상하지 말라고 하면 가장 먼저 분홍 코끼리를 상상하는 것처럼, 생각과 감정은 우리가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짐들이다. 천국을 통과할 때 우리가 유일하게 짊어질 수 있는 짐들이 이런 것들이라면, 가급적이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로 채우고 싶다. 허무하게 픽 꺼질 불씨가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횃불로 세상을 조금이나마 밝혔다는, 그런 자랑스러운 마음을 안고 최후의 어둠을 마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