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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 Nov 27. 2021

과유불급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것들

선착순 5명!


시장 혹은 마트에서나 들려올 말 같지만, 저 대사는 어느 고등학교 영어 시간에 들려왔다. 유쾌한 성격으로 인기가 많으셨던 영어 선생님은 어느 날 플라스틱 통을 하나 가져오셨다. 통 안에는 축축한 흙과 상추가 들어 있었다. 우리들은 모두 띠용 하며 선생님을 보았다. 선생님은 전부터 말씀하셨던 당신의 취미 ‘달팽이 키우기’를 학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통을 교탁 위에 올려두셨다.


수업 시작 전, 우리들은 교탁으로 우르르 몰려와 커다란 달팽이를 보았다. 달팽이는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눈(더듬이)을 휘저으며 자신만의 세상을 활보하고 있었다. 한 친구는 “으앗! 징그러.” 소리치며 도망갔고 다른 친구는 달팽이의 눈을 연신 건드리며 눈이 몸속에 숨어버리는 모양새를 보고 낄낄거렸다. 선생님은 달팽이 눈을 만지는 학생의 손을 탁! 치시더니 장사꾼마냥 입을 여셨다. 자신이 키우던 달팽이들이 이번에 알을 많이 낳았고, 새끼가 많이 생겼으니 선착순 5명에게 이 달팽이들을 키울 수 있는 영예를 주겠다는 게 얘기의 요지였다. 아빠가 키우던 화분을 물어뜯어 우리 집에서 추방당한 강아지를 종종 그리워하곤 했는데, 나는 이번에 새로운 놈에게 정을 붙여보자 싶어 번쩍 손을 들었다. 선생님은 흙과 상추 조각이 담긴 종이컵을 내게 하사하셨다. 그 안에는 조그마한 달팽이 한 마리가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수업 말미에 선생님은 달팽이를 잘 키우기 위한 여러 가지 팁을 주셨는데, 그중 하나는 달팽이에게 계란 껍질을 먹이라는 것이었다. 엥? 계란 껍질 잘못 먹였다가 살모넬라균 막 이런 거에 감염되는 거 아닌지, 의문을 가졌지만 이내 전문가의 말은 믿자고 판단한다. 오랫동안 달팽이를 키워오신 분이니까. 집으로 가는 길, 초등학교 때 자주 갔던 문방구에서 달팽이를 키울만한 플라스틱 통을 산 후 아빠 화분에서 몰래 흙을 퍼 담았다. 엄마는 냉장고에서 수시로 상추를 꺼내 달팽이 통에 던져 넣는 내 모습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언제나 그랬듯이 내 새로운 취미를 존중해 주셨다. 감사하게도.


달팽이는 자기 몸집보다 10배는 큰 상추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아니,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저 조그마한 몸에 커다란 상추가 다 들어가는 게 마술 같았다. 하지만 달팽이의 몸은 투명했다. 투명한 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달팽이가 야금야금 씹어 삼키는 상추 조각들은 그대로 몸속에 비춰져 딱딱한 껍데기 속으로 두둥실 들어갔다. 너 식성이 대단하구나.


몇 주가 지나고 통 내부에 달팽이 똥이 서서히 식별되기 시작했다. 흙을 갈아주기 위해 달팽이를 손등에 올려놓았다. 손등을 간질이는 달팽이의 움직임이 귀여웠다. 낯선 미지의 영토에 착륙한 달팽이는 눈을 휘저으며 위험 요소들을 판단하더니, 별 문제가 없겠다고 느꼈는지 움직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먹는 상추의 양만큼 달팽이의 몸집은 눈에 띄게 커졌다. 그래, 이제 계란 껍질을 줄 때가 왔구나. 계란 껍질은 딱딱해서 씹기 어려울 수 있으니 마늘 빻는 절구에 갈아야겠다.


가루가 된 계란 껍질들을 통 안에 뿌렸다. 과연 이걸 먹을까 의심한 나를 놀리듯 달팽이는 상추를 먹을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가루들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달팽이의 몸속에 가루들이 꽉꽉 차 유영하는 모양새가 마치 이 맛있는 걸 왜 이제야 주냐고 묻는 듯했다. 내가 먹지 못하는 거라면 다른 누구도 먹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나의 고정관념이 오만이었다. 그래, 어떤 녀석들은 정말 돌도 씹어먹을지 몰라.


며칠이 지나고 통을 열어본 나는 깜짝 놀랐다. 마치 자동차를 튜닝하듯 달팽이가 진화해 있던 것이다. 밝고 연약한 색깔이었던 갈색 껍질은 카리스마 넘치는 검은 껍질로 빛나고 있었고, 흘러내릴 것만 같았던 달팽이의 몸에는 두꺼운 무늬의 표피가 감싸여 있었다. 자식이 강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기쁜 일이더라. 난 달팽이의 진화를 감탄하며 지켜보았다.


그날 이후로 난 시간 날 때마다 수많은 계란 껍질들을 갈아 달팽이 통에 뿌려 넣었다. 물론, 다양한 영양 섭취를 위해 가끔 상추도 줬다. 마치 업그레이드되는 게임 캐릭터처럼 달팽이는 점점 덩치를 키우며 강인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통 안을 들여다보는데 달팽이가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난 손가락으로 달팽이 껍질을 툭툭 건드렸다. 보통 이럴 땐 미세하게 움직이곤 하는데, 달팽이는 가만히 있었다. 그땐 몰랐다. 달팽이가 죽었으리라고는. 좀 강해졌더니 대꾸도 안 하는 줄 알고 달팽이 통을 살짝 흔들었다. 아무 움직임이 없자 조급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달팽이를 뒤집어 든 채 껍질 내부를 보았다. 달팽이는 미동도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몸 안에 계란 껍질 가루들을 터질 듯 꽉꽉 채운 채.


며칠 후 선생님께 하소연했더니 애매한 대답만 되돌아왔다. 아니, 주는 것도 적당히 줘야지 얼마나 많이 줬길래 달팽이가 죽냐고. 그날 착잡한 마음으로 달팽이를 묻어버렸다. 그리고 7년이 지난 지금, 난 그 달팽이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이름이 있었는데. 달팽이를 키우기 전에 키웠던 강아지 이름도 기억나는데 달팽이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달팽이가 죽은 모양새를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지 않았나 싶다. 달팽이의 죽음은 완전한 내 잘못이었기 때문에, 죄책감에 그만 시달리고자 그 녀석의 이름을 기억에서 없앴지 않았나 싶다.


생각해보니 7년의 시간 동안 나는 달팽이가 죽은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검색해보지 않았다. 죄책감으로부터 회피하려는 마음이었을까. 그래서 이 글을 쓰면서 검색해봤다. 달팽이가 왜 죽었는지. 선생님 말씀대로 일단 계란 껍질을 너무 많이 주었다. 아무리 조그마한 몸이지만, 모든 생명은 영양분을 고르게 섭취해야 한다. 달팽이에게 계란 껍질이 필요한 이유는 오직 표피(전문적인 용어로는 패각)를 단단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필요 이상으로 계란 껍질을 주는 것은 결국 아무 영양분 섭취 없이 배만 채우게 하는 꼴이었다. 그리고 이건 사람마다 얘기가 다르던데, 계란 껍질을 씻어야 했단다. 역시 살모넬라균. 의심할 거면 제대로 했어야 했다.


달팽이의 죽음을 회상하며,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음식을 가려서 먹으라는 엄마의 철칙 덕에 어려서부터 카페인은 입에 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커피는 가끔 마셨지만 핫식스, 몬스터 류의 에너지 드링크는 손도 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 침대 밑에는 쿠팡에서 산 몬스터 울트라 저칼로리 24개입 한 상자가 떡하니 놓여 있다. 에너지 드링크를 물마냥 마셔대는 동료들을 보며 호기심이 들어 몇 번 마셔봤다가 그만 중독되고 말았다. 마치 빠른 속도로 계란 껍질을 먹어치우는 달팽이가 된 것처럼, 에너지 드링크는 날 강하게 만들어줬다. 그것은 동기부여만으로는 발현되지 않는 힘을 기어이 발현시켜줬고, 운동할 때 각성 효과를 줘서 운동량을 증가시켜줄 수 있었다. 하지만 미래의 에너지를 끌어 쓰는 건가 본지 시간이 지나면 금방 피로감에 빠지곤 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여기서 새삼 발견한다. 에너지의 총량은 항상 정해져 있다. 지금의 나를 일시적으로 강하게 만드는 일은, 나중의 나를 그만큼 빨리 소진시킬 수 있는 일이었다.


마치 포인트를 써서 게임 캐릭터를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이 내게도 가능할 줄 알았다. 희망과 동기부여라는 포인트를 써서 날 강화시키고, 에너지 드링크 게이지를 통해 강화 속도를 증가시키는 일련의 과정들이 전부 날 강하게 만들 줄 알았다. 하지만 계란 껍질을 소화시키지 못한 달팽이는 결국 죽는다. 욕심으로 배가 빵빵해진 채 축 늘어지고야 만다. 인생사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희망은 우리를 일어서고 움직이게 만드는 동력이 되지만, 그것에 눈이 멀면 우연을 운명으로 착각하고 그릇된 판단을 내리기 부지기수다. 증오는 내면의 힘을 끌어올리는 동력이 되지만, 과하면 타인을 불태울 수 있다. 불이 따뜻할 수 있는 적정 거리를 찾는 것이 지혜임을 깨닫는다. 어느 정도는 부족함을 유지하는 것이 달팽이를 살리는 방법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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