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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 Jan 10. 2022

내일이 있어줘서 고마워

판도라의 상자

돌이켜보면 힘들어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은 바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내일이 있던 덕분이었다. 내일은 예측할 수 없기에 두렵기도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예측할 수 없기에 힘이 되었다. 예측할 수 없다는 건 다른 말로 가능성이라 불리니까. 내일은 오늘 같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내일은 새로울 수 있었으니까. 다만, 내가 계속해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 거라는 전제 하에.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날도 있었지만, 막상 겪어보면 두려움은 현실을 이길 수 없었다. 삶에겐 때로 인격이 있어서, 내가 예측하는 일들을 뒤엎은 제 3의 현실을 내 앞에 가져왔다. 그러면 나는 계획에서 벗어난 무방비한 상태로 새로운 현실을 살아내곤 했다. 역시 인생이라는 녀석은 내가 예측해내기엔 벅찬 존재구나, 손바닥 밖에 있는 존재구나 생각하면서. 가끔 힘든 구간이 있었지만 그래도 인생은 어떻게든 살아졌다. 내 손을 잡고 날 삶으로 이끌었던 녀석은 ‘생각’보다는 주로 ‘본능’이었다. 그리고 본능의 마중물은 대부분 고통이어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난 고통을 생각보다 좋아했던 것 같다. 그래서 종종 선택하곤 했다. 내 성향과 상반되는 상황이나 사람들을 마주하기를.


희망은 어쩌면 판도라의 상자와 닮아있다. 상자를 열면 온갖 해악과 죄악들이 풀려나온다. 그러면 덜컥 무서워서 상자를 닫아버린다. 밑바닥에 희망을 남겨둔 채. 상자 안에 무엇이 있을지는 열어보지 않는 한 결코 확인할 수 없다. 결국 희망은 실체가 아니라 믿음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고통을 마주하다 보면 어느샌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우리가 볼 수 없는 닫힌 상자 안에서, 우리가 알 수 없는 내일이라는 미래 너머에서,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타인의 존재 속에서 희망이 숨죽인 채 은폐하고 있을 거라는 믿음. 그리고 그건, 이 모든 고통을 견디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그 어떤 촘촘한 계획을 짜던, 현실이라는 변수는 내가 생각지 못한 내일을 끌고 올 것이다. 계산되지 않을 내일은 내 안의 본능을 일깨워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본능으로 삶을 살아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계획이나 생각이 아니다. 마음가짐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어떤 표정으로 바라볼지에 대한 마음가짐. 상자 속 해악을 두려워하고만 있을 것인지, 희망을 상상하며 맞설 것인지에 대한 마음가짐. 설령 상자 밑바닥에 희망이 없다 할지라도, 믿음만으로 희망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지 그 가능성을 긍정하는 마음가짐. 설령 믿음이 진실과 상반되더라도, 우리는 믿음으로 현실을 바꿔낼 수 있을까? 원하는 진실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믿음이라는 행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로 한다. 그동안 내게 있어 믿음의 전제는 근거였다. 믿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이유가 필요했다. 이유 없이는 내게 그 어떠한 믿음도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판도라의 상자 밑바닥에 뭐가 있는지는 결코 알아낼 수 없다. 때로 우리는 믿음 앞에서 이유나 근거를 도출해낼 수 없다. 우리는 믿을지 말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은 용기, 용서, 도전, 희생, 사랑의 모습으로 우리 삶 속에서 드러난다. 이걸 깨달은 이상, 이제 내 믿음의 전제는 근거가 아니다. 선택이다. 삶의 모습을 바꾸는 것은 희망도 절망도 아니다. 믿음이다. 이 믿음으로 나는 희망에 취하지 않을 것이며 절망에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내게 믿음의 근거는 필요가 없다. 근거는 때로 내가 절망에 슬퍼해야 할 수많은 이유를 대주기도 하니까. 믿기로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어려운 것은 없다고. 그저 어렵다고 생각할 뿐이라고. 힘든 것은 없다고. 그저 힘들다고 생각할 뿐이라고. 정말 힘든 상황일지라도, 내가 힘들지 않기를 선택하면 될 뿐이라고. 그러면 날 가로막는 벽 앞에서 신박한 해답을 생각해낼지도 모르니까. 저 높은 벽을 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벽을 부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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