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죽음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 무라카미 하루키

by 이브와 아담

마음이 상처를 받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상처의 깊이가 얼마나 되든 간에. 가끔 우리는 의도치 않은 상처를 받을 때도 있다. 아마 상대방의 무심코 내뱉은 말이 자신의 내적 약점과 트라우마를 건드렸을 때 그럴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깊은 부분을 알 수 없기에 이러한 상황을 피하는 건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상처가 생길 때 우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행동을 통해 극복할 수 있겠지만 만일 그럴 수가 없다면? 소중히 아끼던 무언가를 영원히 상실하게 되었을 때, 인생을 바쳐 쌓던 공든 탑이 무너졌을 때 우린 한없이 무기력해질 것이다.


우리는 언제 상처를 받을지 미리 예측할 수 없다. 그렇다고 예고 없이 찾아온 상처에 우리 인생의 흐름을 맡길 순 없다. 정성 들여 짠 삶의 계획이 예측 불가능한 변수에 의해 이리저리 방향을 찾지 못하고 움직인다면 우리는 책 속에 등장하는 나오코처럼 삶의 통제권을 잃을 것이다. 이는 분명 주변 사람들에게 일파만파 영향을 미칠 것이고 나오코 역시 그 죄책감 때문에 일종의 거리두기를 시도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이 자살이라는 극단적 형태를 통해 나타나긴 했지만. 이는 그만큼 상처가 깊었다는 뜻 이리라. 나오코의 상처는 회복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녀는 남자 친구 기즈키와 너무 어릴 적부터 사귀었고 성장기간 동안 홀로 존재하는 방식을 겪은 적도 없을뿐더러 배우지도 못했기 때문에 기즈키의 죽음은 나오코의 발달 단계 일부(독립심)의 상실을 의미했을 것이다. 홀로 설 준비가 되지 않았던 그녀는 와타나베나 레이코에게 피해를 준다고 느끼고 이를 견디지 못해 자살한 것이다.


책을 읽으며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기가 굉장히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난 스스로 누구의 도움이 크게 필요하지 않은 독립심이 강한 사람이라 생각해 왔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오코의 일부가 기즈키에게 있는 것처럼, 와타나베의 일부가 미도리에게 있는 것처럼, 레이코의 일부가 그녀의 음악에 있는 것처럼 나 역시 스스로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누군가에게 또는 무언가에 애정이 생겨 마음을 주게 된다면 곧 자신의 일부를 주는 것이리라. 그리고 마음과 사랑을 준 마중물이 사라지게 되다면 우린 커다란 상실의 경험을 할 것이다. 타인의 상실은 곧 자기 일부의 상실 또는 죽음이며 이는 ‘삶과 죽음은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공존한다’ 는 소설의 문장과 일맥상통한다. 우리는 삶과 동시에 죽음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상실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상실과 동시에 우리는 재생한다. 이는 마치 허기에 음식을 찾게 됨과 같이 자연스러운 욕구이다. 만일 상실하지 않았다면 우린 찾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상실은 새로운 가능성의 탐구이고 시작이다. 와타나베는 나오코가 좋았기에 자신을 좋아하는 미도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일부는 나오코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오코의 죽음 이후 그의 일부가 상실되었기 때문에 그는 미도리를 갈구할 수 있었다. 나오코도 자신의 상실을 이해하고 와타나베를 받아들여 독립심을 키웠다면 좋았을 텐데.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생겼을 때 우리는 무기력하게 있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 그때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