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는 태도에 대하여
'인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자연 한가운데 앉아 도를 닦는 사람의 모습일까. 현실을 초월한 듯 평온한 표정,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초연함이 연상되기도 한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 인내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마음고생이 얼굴에 남아 주름이 깊어졌을 수도 있고, 오랜 노동으로 손이 거칠어졌을 수도 있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인내하는 사람이다.
인내를 잘하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아파도, 울어도, 힘들어도 끝내 손을 놓지 않는다. 그 안에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뚜렷한 목표의식이 있다. 사람에 대해 인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녀가 성숙하기를 기다리는 일, 제자가 성장하기를 기다리는 일. 사람들이 함께 엮여 있는 공동체가 무너지지 않도록 끝까지 책임지는 일 모두 인내의 영역이다. 인내는 그저 눈감아주며 시간을 흘려보내는 태도가 아니다. 잘못이 있다면 바로잡고, 책임을 다하고, 때로는 마음을 다해 무릎 꿇는 시간까지 포함된다. 인내는 방관이나 무기력함이 아니라 행동을 동반한 사랑이다. 그래서 인내는 역동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내를 자주 오해한다. 인내를 참고만 있는 태도,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다리는 수동성으로 착각한다. 갈등을 피하고, 결단을 미루며, 자기 몫의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면서 그런 회피를 '인내'라는 말로 포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것은 인내가 아니다. 인내는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정면으로 견디는 힘이다.
사랑 역시 자주 오해된다. 우리는 사랑을 다정한 말과 잦은 교제로만 판단한다. 얼마나 자주 만나느냐, 얼마나 많은 감정을 나누느냐로 사랑의 크기를 가늠한다. 그러나 삶을 실제로 책임지는 사랑은 다정한 말보다 행동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부모님의 사랑을 떠올려보자. 어떤 부모님은 하루 대부분을 밖에서 보내며 일하고,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고, 미래의 위험을 대비하느라 자신의 여유를 뒤로 미룬다. 자녀의 눈에는 그 사랑이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함께 놀아주지 못했고, 곁에 자주 있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랑은 때로 '일만 하는 모습'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부모는 가장 역동적인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가정이 흔들리지 않도록 바깥에서 뛰고, 자신의 편안함을 포기하고 자녀의 오늘과 내일을 책임지기 위해 노력한다. 말로 표현되지 않아도,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해도, 그 자리를 지키는 선택 자체가 사랑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 인내가 있었기에 가정은 유지되고, 아이는 보호받는다. 인내는 이렇게 감정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삶을 지탱해 주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인내는 종종 사랑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딱딱하고, 차갑고,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누군가가 끝까지 책임을 다했기에 가정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정한 말과 순간의 따뜻함만이 사랑이 아니라 무거운 책임과 고통을 지속적으로 감내하는 것 또한 깊은 사랑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인내는 고요하지도, 달콤하지도, 우아하지도 않다. 때로는 고단하고, 초라하며, 지독히 현실적이다. 그럼에도 인내는 위대하다. 그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안위는 내려놓더라도 가족과 공동체, 그리고 맡겨진 사명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택은 사랑 없이 불가능하다. 하루를 살아내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지는 순간에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태도, 누군가와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집요한 목표의식은 사랑이 없다면 오래 유지될 수 없다.
한 사람의 인내는 오늘도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누군가의 삶을 떠받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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