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인해 집에서의 삼시세끼 버라이어티가 이어지는 5주째,
유럽의 코로나 사태 이후 폭주하던 아시아마트 주문도 일정 수량 이하로 구매를 제한하며 어느 정도 안정기를 찾은 듯하다. 참고 참았던 두부와 어묵, 떡볶이 떡, 그리고 청국장 등을 장바구니에 넣는다. 라면 맛있겠다 하는 남편의 말에 그래, 외식은 못하더라도 라면도 못 먹게 하는 건 아니지 하며 클릭클릭, 코로나 이후 가격이 올라간 라면들을 수량 제한 가득 채워 함께 주문한다.
계획한 식비에 추가 비용이 생기자, 어떡하면 이번 주 장은 조금 볼까 냉장고를 열어본다. 싱싱 칸에 자투리 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이 복잡해지고 마음속 또 다른 내가 심술보처럼 투덜거리려는 걸 모르는 척 얼른 무를 다듬는다.
요즘 다시 찾아온 내가 심술을 부릴 때마다 써먹는 수법이다. 실랑이 꺼리를 주지 않은 채, 그 심술에 나 또한 심술보 사감선생이 되지 않기 위해 머릿속을 중립지역에 잠시 대피하는 것이다. 그렇게 안전지역으로 대피한 채, 무의 그람을 재고 그에 맞게 소금, 설탕으로 간을 한 뒤, 간이 베이는 동안 적절한 양의 양념을 준비한다.
보통 같았으면 머릿속 사춘기 심술보와 그에 걸맞은 사감선생이 지난번 깍두기는 너무 물이 많이 많았네, 그때 뭐가 문제였는지 정확히 분석을 먼저 한 뒤에 재료를 재량 해야 한다느니, 이번에 맛이 없으면 내 책임이라느니 한바탕 전쟁을 하며 결국 제풀에 지친 내가 되었겠지.
중립지역으로 대피한 덕분에 깍두기는 그날 밤 완성이 되었고, 이틀을 실온 숙성을 한 뒤, 웬만하면 맛있게 먹어주는 남편의 품평을 거쳐 냉장고로 들어갔다.
독일에서의 10년 차인 나의 삶은 그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막연한 외국에서의 삶에 대한 동경은, 결코 깰 수 없는 타국에서의 고독감을 알게 되었고, 언제나 남들과 비교, 경쟁하며 코앞의 놓인 문제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삶은, 획일화하여 비교할 수 없는 다양한 삶의 종류 중의 하나가 되어 나무가 아닌 숲을 바라보는 시야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라면 하나 겨우 끓이던 나의 요리실력은, 나만의 전매특허 김치, 마파두부, 떡볶이, 호두파이 등등의 레시피의 소유자가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간단할지도 모르지만, 처음 이곳에서 끓였던 케이크 맛 나는 미역국을 맛본 사람이라면 인터넷 글만으로 독학한 나의 요리실력은 정말 무에서 유를 만든 것과 마찬가짐을 알 것이다.
나만의 레시피가 생기기까지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인터넷에서 고르고 골라온 레시피를 바탕으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보며, 멋모르고 무 대신 넣은 비트로 생고기 같은 핏빛 김치를 만나보기도, 그 말로만 듣던 미친 김치, 짠 김치, 배춧물 넘치는 밍밍한 김치. 그렇게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나만의 레시피가 생겼다.
그렇게 이곳에서 누구보다 나은, 누구보다 부족한 게 아닌, 그저 어제보다 달라진 나만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다시 찾아온 나와 코로나가 불러온 막연한 불안감은 언젠가 돌아갈 한국에 대한 조급함을 불러일으켰고, 그 조급함은 이곳에서 얻은 귀한 나만의 레시피를 남들과 비교하게 만들었다. 누구보다 더 맛있다던지 하는 서로의 우위를 비교할 수 없는, 얼마나 각자의 맛을 담았느냐가 중요한 레시피인데 말이다. 내일은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나만의 레시피 그대로 김치를 담궈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