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번호의 수화기 넘어 흐느끼며 내 이름을 부르는 중년의 남자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속상한 마음이 무슨 일 때문인 지는 모르나 술에 취한 듯 알 수 없는 웅얼거림 중간중간에 내 이름만 간간히 알아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 통화는 끊어졌다.
전화의 발신처는 엄마의 사촌오빠. 나랑 동갑내기 사촌(생일이 빠른)오빠의 아빠였다. 옛날 전화기에서 번호를 찾은 건지 울먹임에도 그 목소리를 기억했는지. 초등학교 때 한번 뵈었었던 이모부의 목소리를 다 큰 어른이 되어 어느 날 밤 느닷없이 걸려온 전화에서 어떻게 바로 알아챘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그때 어렴풋 이모 할머님께서 치매가 있으시단 얘기를 엄마를 통해 건내들은 게 생각이 난다.
무슨 일이었을까. 저녁을 먹으려고 느지막이 주방으로 가 숙주나물을 다듬다 그날이 다시 떠올랐다. 그날 이모부는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걸까. 무슨 연유로 그날 밤 그 마음으로 나에게 전화를 거셨던 걸까. 어른이란 어떤 삶을 살아가는 걸까. 나름 나도 어른이라 생각했었던 그때였는데. 십 년쯤이 지난 지금에 와서 다시 그날을 생각해보면 어찌 감히 내가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생각했었나, 이제는 조금은 그 마음을 알 것도 같은데 이 또한 세월이 흐르면 그땐 아무것도 몰랐다 싶을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정처 없이 이리로 저리로 흘러가다 보니 보통은 지겹기만 했던 숙주 다듬기가 금방 끝났다. 매콤한 맛이 그리워 실험적으로 할라피뇨를 사 왔는데 다행히도 이번에는 조금은 매콤한 청양고추맛이 난다. 매번 맵다는 고추는 다 사봤지만 한국인의 입맛엔 모든 게 맹한 파프리카 맛이었는데. 드디어 독일에서의 10년 만에 청양고추 흉내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숙주를 데쳐놓고 비빔양념장에 청양고추를 총총 썰어 넣으며. 다시 그날의 기억을 잠시 떠올린다.
정처 없이 지금이 싫다 미래로 과거로 도망 다니는 나를 붙들여 놓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에만 머물러 있어라 타이른다.
애써 주말을 보내며 괜찮아 뭐 안 해도 되니 지금에만 있어라 두 손 가득 꼭 붙잡고 있다. 그러다 떠오른 그날의 기억과. 그렇게 다들 각자의 삶을 붙들고 사는가 싶다가. 이 와중에 숙주나물 비빔밥 매콤하게 맛있겠단 오랜만에 아주 조그맣지만 반짝이는 삶의 기쁨을 발견한 것 같아 기분이 살짝 설레었다가. 참나. 그래도 여기 있어라 붙들고 있었더니 이런 거 하나에 또 좋아하네 싶다가도. 아. 그날 밤 수화기 넘어 몇 분이라도 더 들어드릴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그러가 저녁 준비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