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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긴가 Apr 22. 2020

어느 날 여우를 만났다

단순한 삶의 반복


1.

여기봐바, 쉿, 빨리빨리.


엉거주춤 어리둥절한 걸음으로 창가로 갔다. 우리 집 창가 넘어 보이는 옆 건물은 코로나 19 가 유럽을 덮친 뒤로 몇 주째 휴원 중인 유치원이다.유럽 셧다운 이후로 장보는일 외에는 밖을 나가지 않은, 비현실적일 만큼 고요한 초록빛 풍경 속 집안 창가 너머로 또 하나의 비현실이 펼쳐졌다. 아이들이 오지 않는 쑥쑥 자라나는 잔디밭 위에 무엇인가 땅에 코를 박고 킁킁 거리며 먹을만한 것을 찾고 있었다.


작은 여우 한 마리가 그곳에 있었다.


3년 전 이곳에 처음 이사 온 날 밤. 아랫집 개의 이상한 짖는 소리에 나가본 남편은, 아주 작은 여우를 보았다고 했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마주친 남편과는 달리 나에게는 만남의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렇게도 한 번은 보고 싶었던 여우를, 이렇게 밝은 대낮,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드디어 나는 마주했다.


조심스레 창을 열어 우리 사이에 마주한 유리막을 걷어낸다. 다행히 여우는 여전히 킁킁 거리며 잔디밭을 돌아다닌다. 이 순간이 현실인지 꿈인지 멍하니 그 자리에 한참을 서있는 동안, 주섬주섬 들고 온 견과류를 남편이 풀 스윙으로 울타리 넘어 잔디밭으로 건넨다.


안돼, 도망가면 어떻게 해! 하는 순간, 툭 떨어진 견과류 소리에 고개를 든 여우가, 잠시 경계하는 듯 우리를 쳐다보더니 배가 고팠는지 야금야금 맛있게도 먹는다.

세상에나.


그렇게 우리는 울타리 넘어 여우에게 몇 번의 간식을 던져주며 꿈만 같은 경험을 했다. 경계가 사라진 여우가 울타리 가까이 왔을 때야, 혹시나 울타리를 넘어와 아랫집 개에게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남편의 말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창을 닫았다.




2.

삶이 그저 똑같은 매일의 반복인 것만 같은 날이 있다. 하필 그날이, 나를 찾아온 나와 함께하는 날일 때면, 나는 하염없는 생각의 꼬리를 쫓다 미로의 길로 들어선다.


삶이란 무엇일까.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견디어낼 삶의 기쁨은 무엇일까.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할까.


보이는 다른 이들의 모습에서 나를 찾고, 다른 이들에게 보이는 나의 모습에만 집중하다 보면, 우리는 진짜 자신을 잊어버린다. 그렇게 다시 찾아온 나는 타인보다 더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를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는 나를 보며, 섭섭함, 외로움 그리고 치밀어 오르는 알 수 없는 화를 참지 못한 채 생각의 꼬리를 쫓는 나에게 외친다.


삶이란 덧없어! 무의미한 반복의 연속일 뿐이야! 그 속에서 견디어낼 기쁨은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거야!
너는 더 이상 동화 속 해피엔딩을 믿는 아이가 아니잖아?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거야! 삶이란 그런 거야!

그렇게 빠져나오기 힘든 미로의 길로 나를 홀로 보내어 버리곤 했다. 이번에 나는 달랐다. 또다시 화를 내고 돌아서는 나를 나는 붙잡았다. 아직 나에게 나는 낯선 얼굴이지만, 분명 다시 찾아온 나는 나임을 알고 있다고.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나는 나를 다시 알아가고 싶다고.




3.

그렇게 다시 찾아온 나는 나와 마주 앉았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만가고 무거운 정적만이 함께일 뿐이었다.

어색한 시간이 한참이 흘렀을까, 조심스레 나는 말을 꺼내어 본다.

누가 그러던데, 삶은 그냥 반복되는 똑같은 하루하루인 것 같아도, 그 속에 작은 행복도 있고, 또 내일은 어떤 다른 일이 생길까 하는 희망도 있고..
각자의 삶의 의미란 주어진 걸 찾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직접 의미를 만드는 거래.


남들의 예를 늘어놓는 나를 향해 나는 말했다. 다 맞는 말인데 그래서 그 속의 작은 행복이 뭔데. 그 의미라는 걸 어떻게 만드는 건데?

아차 싶다. 또다시 나는 다른 이의 생각을 내 생각이라 말하고, 나와 내가 함께 찾아야 할 길을 나보고 찾아내라고 아주 상냥히 에둘러 말했던 것이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그렇게 다시 어색한 침묵의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나는, 창밖의 여우를 만난 것이다.



4.

여우를 만난 특별한 순간도 잠시, 또다시 하루는 반복되고 일상은 무채색으로 물들어간다.


별거 없는 삶이네 라며 다시 심술부리려는 나에게 애써 웃어 보이며, 힘들게 팬을 들어 끄적끄적 기억을 그려본다.

여우가 좀 이상한데 비아냥 거리는 나를 또 애써 웃어 보이며, 다시 그리고, 또 그리고, 또 그려낸다.

숱한 여우를 마주하고 나서야 나는 나에게 “하긴, 그날 재미있는 경험이었어.” 라며 겸연쩍히 웃어 보인다.



5.

그날 해 질 녘, 그 여우는 다시 찾아왔다.

이번엔 아예 똬리를 트고 자리 잡고 앉아 한참을 나를 바라보다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지자 홀연히 사라졌다.


그렇게 삶의 반복 같던 나의 오늘은 생각지도 못한 특별한 날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만남에 신이 난 나는 어색함도 뒤로한 채 오늘 너무 좋지 않았냐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그 순간 나는 보았다.

낯선 내 얼굴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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