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속단하거나 판단하지 말기
어느 교도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수감자 중에 손글씨를 기막히게 잘 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밤마다 그를 불러내어 각종 보고서와 서류철 표지의 글씨를 쓰게 했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그날도 교도관들은 그를 불러내어 아주 늦은 시간까지 각종 보고서와 서류철 표지 글씨를 쓰게 했습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 시킨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 교도관이 말했습니다.
“배 안고파? 짜장면이나 시켜먹고 하지”
그는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교도소 안에서 짜장면을 먹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는 무기수였고, 자장면을 먹은지 몇 년이 되었는지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로 오래되었습니다.
잠시 뒤 철가방을 든 배달원이 사무실에 도착했고, 식탁에 짜장면 내려 놓는 소리가 ‘턱, 턱’ 들렸습니다.
순식간에 고소한 자장면 냄새가 사무실에 퍼졌습니다.
하지만 신분이 신분이다보니 모른체 하고 계속 글씨를 썼습니다.
그때 자장면 랩을 벗기던 교도관이 말했습니다.
“어이, 식기 전에 먹고 하지”
그는 말 그대로 감개 무량했습니다.
‘드디어 감옥에서 자장면을 먹게 되는구나’
그는 기쁜 내색을 애써 감추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 조금 남았는데 마저 쓰고 먹지요.”
그 순간, 사무실 안에 정적이 감돌았습니다.
분위기도 아주 어색해지고 말았습니다.
교도관들도 머쓱해 했습니다.
그 교도관이 ‘식기 전에 먹고 하라’고 한 사람은 그 수감자에게 한 말이 아니라 사무실에 있던 다른 교도관에게 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 수감자를 위한 자장면은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그 수감자’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으로 유명한 신영복 선생입니다.
신영복 선생은 대한민국 진보계를 대표하는 경제학자이자 문학가였지만 뛰어난 서예가이기도 했습니다.
선생이 쓴 글씨 중 유명한 것이 오랫동안 광화문 교보문고 빌딩 외벽에 걸려있던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라는 글씨입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소주 ‘처음처럼’도 신영복 선생의 글씨입니다.
자장면 이야기는 신영복 선생이 돌아가시기 2년 전에 펴낸 《담론: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자장면 이야기를 하면서 신영복 선생은 ‘나는 직관적 판단을 좋아하고 그것도 빨리한다. 수학 문제도 빨리 풀고, 상황 판단도 빨리하는 편이다. 그런데 그때 결심했다. 절대로 미리 속단하거나 판단하지 말고 한 박자 늦추어 대응하자’며 자신에 대한 반성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참고로 그날 교도관들은 그들끼리 자장면을 먹기 시작했고, 때를 같이해 신영복 선생은 감방으로 되돌려 보내졌다고 합니다. 그때 시간이 밤 11시가 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