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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바리 Aug 11. 2018

양극화로 인한 퇴행성질환

우리는 모두 오아시스를 이루고 살 수 있다~

                        



© naturwohl-gesundheit, 출처 Pixabay


퇴행성 ( 退行性 ) 이란 말을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생물체의 기관이나 조직이 퇴행적으로 변하는 성질 이라고 나와 있다.

그럼 퇴행 ( 退行 ) 이란 뜻은 무엇인가?
퇴행은 진보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감을 의미하고 유사한 말로는 퇴화하다
라는 단어가 있다.

아울러 퇴행이란 단어의 다른 뜻을 보면
공간적으로 현재의 위치에서 뒤로 물러가거나 시간적으로 현재보다 
앞선 시기의 과거로 가다 라는 말로
유사한 말로는 역행하다 라는 단어가 있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내 화장실 세면대.. 세면대의 높낮이를 달리하여 자연스레 물이 빠지게 만들었고 디자인마저 유려한 곡선의 아름다음을 놓치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흘러 서서히 완성이 되어서 제기능을 잘 발휘하고 있는데 
어느 날 시간이 흘러 완성된 시기의 기능보다 아니 오히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못해지는 퇴행성 질환!!


© schuldnerhilfe, 출처 Pixabay


지금 대한민국 경영과 기업경영에 가장 큰 문제가
오래된 양극화로 인한 퇴행성질환의 만연으로
보다 근본적인 질환의 대처 없이 대증요법으로만 때우고 있다


물론 양극화라는 게 하루아침에 생긴 건 아니다
처음에는 소득이 많은 사람이나 적은 사람이나 별 문제가 없는 것처럼
서로 간의 다른 행복지수라는 걸 가지고 잘 지내면서 순행하다가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침전물이 퇴적되듯이 하나하나 쌓이다
어느 날은 눈더미처럼 커져버려서 겉으로는 과거와 별 다른 문제없는 늘 같은 하루 같지만
실은 속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그런 공룡 같은 괴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자꾸만 그 공룡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며 순행은커녕 날이 갈수록
역행을 하다가 점점 역주행의 속도가 빨라지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때그때 일어나는 증상에 맞춰서 처방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곧 대증요법으로 양극화 퇴행성질환의 보다 근본적 처방이나
원인요법이 되지 못하고 있다.

© intographics, 출처 Pixabay


퇴행성 관절염의 경우를 예를 들면 당장에 걷는데 또는 서있는 데에
너무도 통증이 심해서 pain killer 제품을 찾을 수밖에 없고
우린 그것을 대증요법 ( 對症療法 )이라고 한다.
즉, 우선 증상이 통증이 심하니 통증부터 제거하는 것인데
이게 오래되다 보면 통증을 일으키는 원인물질이라고 생각되는
프로스타글란딘 생합성을 저해하는 pain killer 제품을 찾게 된다 
그런데 이 pain killer제품들이 알고 보면
위 보호 물질까지 저해하여 위장장애나 심할 때는 위궤양 위천공 까지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그나마 낫다는 COX-2 제품을 선택하게 되고
무조건 따르게 되는 것이 위산 억제제( tidine계열, PPI 등 )
와 소화불량이 동반될까 소화제라 불리는 소화효소제 
그리고 정확히 임상적으로 증명되지 못한 일반 효소제 등이
자연스레 처방된다...


상하시 구도심이 이런 멋진 뷰를 어머니를 모시고 같이 보고 싶다그러나 필자의 어머니는 무릎 연골이 다 닳아서 없어진 지 오래고퇴행성관절염을 오래 앓고 계셔서 쉽게 모시질 못한다.



이 보시게 그건 핑계에 불과하네
자네가 조금만 신경 썼으면 어머니 무릎이 그렇게 나빠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 멋진 뷰를 진정 보여드리고 싶었다면
 조금만 더 일찍 어머니를 모시고 갔으면
후회하지 않을 일 아닌가?



그렇다 양극화로 인한 퇴행성질환이 하루아침 이야기는 아니라 하지만
더 나아가 근본적인 대책이 있을 수 없는 이미 퇴화하여 제기능을 전혀 발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아무런 해답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 evankirby2, 출처 Unsplash


알고 보면 너무나 공룡처럼 거대해서 어디부터 손을 댈지도 모르겠고
혹여나 더 나빠지지는 않을까 고민되는 양극화의 퇴행성 질환..


사막 한가운데 저 이제 막 싹을 틔운 저 작은 씨앗 하나가 사막의 가속화를 
막을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아닐까?


어머니가 아프시기 전에 수백 번 수천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왜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어머니를 모시고 해외여행을 가질 못했을까?
청년실업을 위해 청년실업수당이라는 훌륭한 촉진제를 투여했지만
청년실업률이 나아지지 않는 대증요법이란 게 증명되었으면
정부와 기업은 사막 한가운데 내가 먼저 씨앗을 심고 싹을 틔우는 노력을 했어야 하지 않을까?



© willianjusten, 출처 Unsplash


기업( 회사 ) 내에도 양극화가 심각하다.


우선 첫 번째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

이는 설명을 하기도 싫다.
이 땅의 청년들이 중소기업의 쥐꼬리 월급을 받고 열정페이를 강요받느니
우선은 생활비 때문에 알바를 통해서 충당하고 취업재수 삼수 사수를 감행하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하며 실제로 그게 훨씬 현명한 판단이고 선택이다.



© huntersrace, 출처 Unsplash



두 번째, 회사 내부 조직 내에 양극화는 정말 심각하다.
이것은 대기업, 중소기업을 가리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중소기업이 더 심각한 양극화 문제를 안고 있다.
심지어 중소기업은 그 양극화 문제를 감지하고 있으면서도 
대증요법마저도 시행하지 않고 있다.

운 좋게 회사를 물려받아온 대기업 오너 일가의 갑질과 변칙적 재산증식은
말할 것도 없지만..
중소기업의 오너 일가들의 드러나지 않는 갑질과 양극화에 따른 
그들의 모럴해저드는 너무 자연스레 하루하루 벌어진다.

직원들 복지예산이 아까워 점심값 책정도 주변 식당의 간짜장면 한 그릇 값도
안 되는 예산을 책정해 놓고 그 마저도 아깝고 아껴야 해서 점심을 굶거나
예산보다 값싼 편의점에서 빵이나 우유로 때우는 중소기업 직원들이 허다하다.

정녕, 그 기업의 경영진은 주변 식당의 점심 한 끼 시세를 몰라서
그리 책정한 것일까?
이리 정책을 세우고도 양극화에 난 책임이 없다 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도 조직 내에 양극화는 이미 고칠 수 없는 퇴행성질환이야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 Clotina, 출처 Pixabay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퇴행성 질환에 걸린 척박한 사막이라도 오아시스를 이루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방법은 늘 존재해 왔었다.


"최저임금은 올랐다는데 내월급은 왜 그대로 일까요?
"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답이 없어 보일 때는 노조가 답이다"

최근에 심심찮게 들리는 민주노총의 광고문구이다
그러나 실상 노조가 없는 중소기업이 있는 기업보다 더 많은 건 알고 계시지 않은가?


© arty_nyc, 출처 Unsplash


그렇다 양극화로 인한 퇴행성질환은 애초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이 축적돼 흐른
노인성 질환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금 더 가진 사람들, 책임 있는 사람들
경영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퇴행질환 이었던 것이다.

분명 내가 저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성과와 문제에 대한 해결을 하고 있는데
그는 애초부터 좋은 출신( 물려받은 금수저, 유명대학 출신, 오너와의 관계 )이라
더 많은 복지와 더 많은 월급을 받고 다니는 고칠 수 있는 양극화를 형성하고 있다.


아래 두 가지 사진을 보여드리겠다..
둘 중에 누가 고쳐야 옳겠는가?
그리고 양극화 그것이 과연 오랜 시간 축적된 퇴행성 질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영주가 있으신가?

비좁은 이코노미 단체석에 몸을 싣고 해외 출장지를 와서 적은 출장비로 인해
컵라면 하나로 때우는 같은 회사 내에 직원이 있다. 실제로 이 직원은 비즈니스를
모 아니면 도라는 모험을 하며 감행하고 있다.

반대로 비행기 일등석에 고급 수제라면을 대접받는 같은 회사 내 사람이 있다..
이직원은 그 컵라면을 먹는 직원을 닦달만 하면 되는 직위에 있거나

아니면 그런 결정을 할 수 있는 오너 또는 결정권자의 비위만 잘 맞추는 사람 또는

그와의 출신관계가 유사한 사람이다.

글을 쓰면서 필자는 매우 우울감에 휩싸여 있다


그렇다 양극화로 인한 퇴행성 질환은 애초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이 축적돼 흐른
노인성 질환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금 더 가진 사람들, 책임 있는 사람들
경영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퇴행 질환이었던 것이다.


이 보시게 그건 핑계에 불과하네
자네가 조금만 신경 썼으면 어머니 무릎이 그렇게 나빠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 멋진 뷰를 진정 보여드리고 싶었다면
 조금만 더 일찍 어머니를 모시고 갔으면
후회하지 않을 일 아닌가?


필자가 이말에 자꾸 눈물이 나는 이유가 혼자 사막에 싹을 틔운걸 넘어서

이미 가지가 되어있고 나무가 되어감에도

혼자 바오밥 나무를 심었다는걸 알고 있어서일까? 매우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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