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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주 Sep 08. 2022

만인 대 만인의 카톡

다르게 생겨먹은 모녀의 세상 모든 일 각자 리뷰 : 단톡방

엄마 (68년생)

/카톡 느림. 쓰는 건 둘째치고 읽는 것도. 아놔.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가던 나는 문득 깨달았다. 요즘 지하철에서 낯선 사람과 눈이 마주쳐서 어색하거나 불편한 기억이 별로 없다는 거. 왜? 다들 휴대폰을 보고 있으니까.  나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전화기를 들여다보는 일이 거의 없다. 그거 안 한다고 책을 읽거나 고상한 뭔가를 하는 건 아니다. 멍하게 있는 걸 즐긴다. 멍하게 풍경을 보고 멍하게 사람들을 보고. 그러다 가끔 놀라는 거. 우와~ 다들 왜 이렇게 손이 빨라? 내용은 안 보여도 대화창이 얼마나 빠르게 질주하는지 감탄이 절로 난다. 내가 노트북 자판 두드리는 속도 정도는 부와앙 추월할 거 같다. 많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누군가와 연결되려고 하고, 어딘가와 닿아 있길 원하나 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의 대표 이미지. 주인공 쿠사나기가 머리부터 목과 등에 이르기까지 주렁주렁 케이블을 꽂고 있는 그림. 네트는 광대하고 사람들은 초대된다. 누군가의 대화방에.


예전에 딸이 보여준 유튜브 영상이 생각난다. 제목은 ‘헬창 단톡방에서 숨은 가짜 찾기’ (헬창이란 단어에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는지 걱정되지만 애초에 그 영상 제목이 그렇다) 얼핏 봐도 온몸이 근육으로 무장된 젊은이 4명과 운동을 알지 못하는 1명, 이렇게 총 다섯 명이 서로 안 보이는 채로 단체 채팅을 한다. 여기서 운알못 1명은 자신이 근육남인처럼 행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누가 가짜인지 밝혀내는 게임을 펼친다. 마피아 게임과 비슷한 건데, 영상이 꽤 재밌었다. 시작하고 얼마 안 됐을 때 가짜는 위기를 맞는다. 근육남 중에 누군가 ‘하체 중에 어디가 제일 자신 있으세요?’라고 물었는데, 가짜는 별생각 없이 ‘힙’이란 답을 올린 거다. 그때부터 비상벨 에엥에엥.  진정한 헬스인은 힙이라고 하지 않고, 엉덩이나 둔근, 혹은 대둔근, 중둔근 이런 식으로 말해야 한다는 거다. 들통나나 싶어서 어찌나 쫄깃하던지. 댓글 역시 공포영화 못지않다고 호들갑이었다. 이 영상을 만든 채널에는 이거 말고도, 50대 단톡방에 숨은 20대 찾기, 샤이니 키 찐팬 단톡방에 숨은 키 찾기, 몸치 단톡방에 댄서 찾기 등등이 올라와있는데 꽤 재밌는 아이디어다 싶었다. 정체성을 공유하는 단톡방의 특징을 역으로 이용한 센스.

그렇다. 단톡방은 정체성을 공유한다. 어쩌면 내가 단톡방 알람을 꺼놓는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인 거 같다. 나는 단톡방의 정체성이 갑갑하다.


일 끝나고 헤어졌는데도 계속 울려대는 업무용 카톡은 당연히 껄끄럽지만, 나는 사적인 단톡방도 그리 즐겁지가 않다. 여행을 앞두고 계획을 공유해야 하거나 같은 관심사로 똘똘 뭉친 단톡방은 신나서 하지만, 서로 각별할 것도 없이 느슨한 관계인데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단톡방. 피곤하다.

그런 단톡방은 거의 유일한 존재 이유가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건데, 그 정체성이란 게 오늘 하루를 사는 나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때가 많다. 아이 학부모 모임, 친인척, 동창, 그 밖에도 이런저런 모임을 통해 만들어진 단톡방들.

그런 단톡방이 중요한 역할도 하고 고마울 때도 있지만, 같이 얘기할 게 딱히 없는 상태에서 궁금하지 않은 누군가의 사생활이 불쑥불쑥 올라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하다. 어디에 갔다는데 부러워해야 할지, 뭘 먹었다고 하는데 좋겠다고 해야 할지, 좋은 글이라고 올렸는데 별로 와닿지 않을 땐  어떻게 해야 하나.  (헉 지금 내 글을 읽는 당신도 혹시? ㅠㅠ )  


두루뭉술하게 묶여있는 정체성은 운신의 폭을 좁게 만든다. 시큰둥 해도 엄지척 이모티콘을 쓸 때가 있고, 얼굴에 웃음기 하나 없으면서  ㅋㅋㅋ를 올리기도 하고, 별 감흥이 없으면서도 토닥토닥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한다. 좋은 게 좋은 걸로. 서로 꽤 생각해주는 척하는 걸로. 그냥 그렇게.


조사된  보면,  2022 4   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이 실행한 카톡은 모두 996 . 일인당 하루 67번씩 카톡에 접속하는 셈이라고 하는데 한번 생각해보자.   많고 많은 카톡 중에, 진심을 다해 엄지척을 올린 오리는  번이었고, 정말 마음 한가득 하트를 날리는 어피치와  마음으로 응원 나팔을 불어준 라이언은 과연  번이었을지. 어쩌면 우린 손쉬운 하트에 중독되고, 고민 없는 위로를 과소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생에  한번 아름답게 노래한다는 새의 얘기나 76년에     있는 헬리혜성 같은 , 이젠 정말 전설 오브 전설이   같다. 과잉을 과소비하는 시대이니 말이다.  


단톡방의 알람을 꺼놓을 수 있게 해 놓은 건, 작지만 소중한 기능이다. 분명 그걸 만든 사람도 단톡방에서 시달려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겠지? 혹시 톡방 개발 단계에서 그랬던…?




딸 (97년생)

/선택적 투명인간


단톡방에는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

말하는 사람과 말 안 하는 사람.

평균 비율은 3:1로 네 명이 모이면 한 명은 투명인간을 자처한다. 인원이 20명을 넘어가면 역 비율이 되기도 하지만.


말을 한다고 3명의 대화 양이 똑같은 건 아니다. 이슈를 끌어오고 대화를 주도하는 사람 1명. 맞장구와 부연을 담당하는 사람 1명. 'ㅋㅋㅋ'나 이모티콘으로 간간히 리액션을 보내는 사람 1명. 아이돌 그룹 포지션만큼이나 역할이 정확하다. 셋은 하루 종일 직장 스트레스, 연예뉴스, 점심메뉴 등 시답잖은 얘기들을 공유한다. 차곡차곡 쌓인 말들은 순식간에 300개를 넘긴다.


항상 빨간딱지를 붙인 카카오톡을 바탕화면에 두고 있는 사람. 이 투명인간은 간헐적으로 채팅을 읽는다. 정확히 말하면 '읽는' 척을 한다. 하나하나 정독하기엔 그 양이 방대하고 대부분은 사화(死話)가 되었기 때문에 채팅창을 한 번 들어갔다 나와 읽음 표시만 하는 것이다.

단톡방 속 친구들이 싫은 건 아니다. 어색한 것도 아니다. 다만 내려도 내려도 끝도 없는 말들이 피곤할 뿐이다. 방이 생긴 초창기엔 약간의 미안함을 담아 이모티콘이라도 보낼 때가 있었지만 이젠 친구들이 나 없이도 잘 떠드는 걸 알아 그러려니 하고 내버려 둔다. 친구들이 너도 말 좀 하라고 잔소리를 해도 수시로 바뀌는 맥락이나 3초에 10번씩 울리는 알림이 엄두가 나질 않는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알쏭달쏭 모바일 세상 속 정보 과잉은 피로로 직결된다. 한 명의 발언에 말이 쌓이고 쌓이면 대화는 공갈빵처럼 부푼다. 실속 없는 리액션과 배고프다 졸리다 같은 투정뿐인 걸 알아도 숫자만 보면 한숨이 나온다. 일대일 채팅은 필요한 용건만 주고받을 수 있고 맺고 끊음도 나의 의지로 조정할 수 있는데 이 놈의 단톡방은 명이 훨씬 질기다. 끊길만하면 주제가 튀어나오고 잊을만하면 톡방이 끌어올려진다. 아무리 새로운 이슈가 올라와도 부동의 실시간 검색어 1위는 오늘의 날씨이듯 단톡방은 늘 최상단을 지킨다.


단톡방의 피곤함은 비단 '말'만의 문제는 아니다. 좋아하는 친구들과 나의 관심사만 있다면 수시로는 아니어도 언제든 참여할 의사가 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라면 곤란하다. 모든 단톡방에는 한 번 들어간 이상 '나가지 않는다'는 암묵적 룰이 있기 때문이다. 나가기 기능이 버젓이 존재하지만 그 버튼을 누르는 순간 친구들은 동요할 것이다. 쟤가 무슨 일이 있나? 화가 났나? 우리와 관계를 끊고 싶나? 막차니 부모님이니 자연스럽게 핑계를 둘러대며 떠날 수 있는 대면 모임과 달리 단톡방에서의 이탈은 절교선언으로 치환된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어떤 때엔 불편함의 표시로 이탈을 하고 싶기도 하다. 나와 맞지 않는 구성원, 보고 있으면 불쾌한 대화 흐름이 나와도 꼼짝없이 지켜보고 있기란 여간 괴로운 노릇이 아니다. 얘들아 우리 그런 말은 자제하자!라고 보내기엔 비언어적 요소로는 소통할 수 없는 이곳에서 나의 한 마디가 어떤 파동을 불러올지 예측할 수가 없다. 단어를 잘못 선택했다간 소명하기도 어렵고 캡처로 영구적으로 남을까 두렵다. 해서 결국 입을 다물고 채팅 알람을 끄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가까워지고 싶어서, 친해지고 싶어서, 다 같이 놀았으면 좋겠어서 시작했는데 그게 가능해지자 멀어지고 싶어졌다. 가족은 떨어져 살아야 화목하다더니 다른 관계들도 다르지 않음을 단톡방으로 깨닫는다. 물론 단톡방에서 이것저것 이야기하는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이해와 공감의 소통. 그걸 나와의 관계에서 상대가 기대하는 거겠지? 그런데 단톡방이라는 건 딱 하나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업무 톡방 50개와 동창 동기 톡방 10개, 거기서 파생된 작은 톡방 5개(비유다. 난 그렇게 친구가 많지 않다.) 쯤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모든 기대에 부응해주자니 배 째라 드러눕게 된다.


쭉 글을 쓰고 나면 드는 의문이 있다. 이 얘기는 나와 내 친구 가족들이 모두 한번씩은 토로했던 고충들이다. 내 대부분의 주변인들은 탈-단톡방을 꿈꾼다. 그렇다면 대체, 단톡방을 굴리는 자는 누구인가. 다들 어쩔 수 없이 한마디 하다 보니 대화가 300+가 된 거란 말인가? 그게 가능한가? 혹시 사람은 네 명인데 타자를 치는 손은 다섯개? 단톡방 미스터리. 이 시대의 도시괴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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