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일
딸의 생일이다(10월 2일 현재). 생일인데 엄마의 병을 걱정해야 하는 딸의 기분은 어떨는지. 제법 속 깊은 아이라서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는다. 엄마라는 캐릭터는 좀 희한하게 작동한다. 엄마는 아이가 철없이 자기 속을 드러낼 때도 걱정이지만 그보다 짠해지는 건 아이가 웃자란 모습을 보일 때다. 어릴 때부터 내 앞에서 문 한번 쾅 닫은 적 없는 아이. (그에 비해 난, 엄마한테 싫은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의 분노를 과시하기 위해 쾅 소리 나게 문을 닫곤 했다. 예상보다 큰 소리가 나면 진짜 혼날까봐 쫄기도 하면서) 작년에 처음 암의 위험성을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불평을 하건 짜증을 내건 아이는 한결 같이 담담하고 의젓하게 군다. 한편으론 고맙고, 또 한편으론 안쓰럽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섭섭하다. 기집애 가끔은 엄마한테 어리광 좀 부려도 되련만.
대학 동창들과 함께하는 단톡방에 결국 방사선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는 걸 알렸다. 사람들에게 그 소식을 언제 전해야 하나, 굳이 말해야 하나 고민했기 때문에 작정하고 소식을 전한 건 아니다. 다 같이 한 번 만나자는 얘기가 나왔고, 난 그러기가 좀 어렵다는 걸 설명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암이 흔해졌다지만 친구들은 놀란 기색이다. 우리 중에 누구도 중대질병으로 고생한 케이스가 없으니 더 그랬겠지. 위로의 말을 전하고 안타까움을 건네지만 말을 길게 잇지는 못한다.
몇 번 해보니 암 소식은 그런 거 같다. 전해 듣는 순간 할 말이 참 없게 만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반응도 대개 비슷하다. 걱정과 황망함이 뒤범벅 되어 결국 틀에 박힌 말만 하게 되나 보다. 입장을 바꿔봐도 그 '할 말 없음'에 수긍이 간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할 말 없는 순간을 맞는다. 슬픈 소식을 들으면 '에휴~'하며 등을 쓸어주는 게 고작이고, 기쁜 소식을 들으면 '축하해'하며 웃어주는 게 전부다. 진심이지만 그 말 외에 무슨 말을 더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런 경우 나는 종종 나를 의심한다.
내가 이럴 때 할 말을 못 찾는 게 재치 부족인가? 아니면 관심 부족인가? 그것도 아니면 혹시 내가 이 친구의 기쁜 일을 질투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혹은 친구의 아픔에 무감 해진 건가?
어떤 소식은 내가 입주해있는 마음의 평수를 가늠하게 하는 거 같다. 나의 경우, 조금은 부끄러워질 때가 제법 있다. 아 난 고작 이 정도였구나.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보면,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을 접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막바지 택시 안 장면에서 오드리 헵번은 반갑지 않은 편지를 받게 된다. 불길함을 감지한 그녀는 편지를 읽기 전에 자신의 핸드백을 건네 받아 립스틱을 꺼내 바른다. 그런 편지를 립스틱 없이 읽을 순 없다면서.
어려서 봐서 그런가 그 장면이 유난히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어릴 땐 '이쁜 여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느낌이 좀 변했다.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을 땐 립스틱이라도 발라야 한다는 생각.
겉치레 얘기가 아니다. 마지막까지 '나'다움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는 거다. 그게 누구는 립스틱일 수 있고, 누구는 단정한 면도일 수도 있고, 누구는 펜과 종이일 거다.
그런 의미에서.
암 소식을 전하는 나는 어떤 표정과 억양이어야 할까. 어떻게 전해야 '나'다울수 있을까. 굳이 뭐 콧구멍에 힘줘가며 이겨내고 말겠다는 필승 의지를 드러내고 싶은 건 아니다. 그저 덤덤하고 조용히 견디고 싶은 마음을 전하고 싶고, 그러면서 나 스스로도 마음을 다잡고 싶다.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미란다가 아이를 낳으러 들어가면서, 의료진과 친구에게 눈물이나 환호 요란한 응원 등등 호들갑 떨지 말고 조용히 있어달라고 했듯이 나도 이번엔 좀 어른스럽게 이 기간을 통과하고 싶다. 물론! 성격상 차암 어렵겠지만. (역시 암은 힘이 센가 보다. 사람을 변하게 하다니 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