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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 Nov 22. 2021

작고 소중한 나의 근무메이트

곰솔누리숲의 청설모

 숲에 있으면 감각이 깨어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된다. 오감의 능력치가 10%씩 상승하는 느낌이랄까.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꽃과 열매들을 귀신같이 찾아내고, 자극적인 냄새 외에는 반응하지 않던 코가 은은한 나무의 향기를 예민하게 맡아낸다. 짹짹 쪼르륵 쪼르륵 우는 새소리에 귀가 아닌 고막이 간지러울 정도다. 라고 한다면 ‘에이 그건 좀 오버 아니야?’라고 할까? 하지만 정말 그만큼 감각이 살아난다.


 바람 한 점 없던 무더운 여름날, 폭염주의보로 운동 삼아 숲을 거닐던 사람들의 발걸음마저 줄었다. 한낮에 찾아든 고요함이 어색하면서도 반가웠다. 이렇게 맑은 날, 나 홀로 숲속을 거니는 경험을 하기란 흔치 않으니까. 깊게 숲을 감각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쓱, 쓱 도서함 위에 내린 마른 소나무 잎들을 쓸어내며 적막을 깨본다. 빗자루가 시멘트를 간질이는 소리가 퍽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꼼꼼히 빗질하며 소리를 즐겼다.


  “포로록, 포로록!”


 낯선 소리에 고개가 휙 돌아갔다. 바람에 나부끼는 이파리 소리라기엔 너무 크고, 나뭇가지가 떨어지는 소리라기엔 다소 작은 소리였다. 무언가가 수풀 사이를 빠른 속도로 훑고 지나가는 듯한 소리였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주위를 살폈다.


  “푸드덕, 턱!”


 좀 전보다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소나무 가지 사이로 검은 털 뭉치가 ‘뿅’하고 나타났다. 청설모다.

 도심 속 숲에도 청설모가 살다니! 나무 기둥을 타고 쪼르륵 내려오더니 중간에 멈춰서는 도리도리 고개를 돌리며 좌우를 살핀다. 가까이서 보고 싶은 욕심에 살금살금 다가갔지만 실패! 얼마나 잽싼지 금세 나무 기둥을 타고 올라가 가지에 우뚝 섰다. 그리고는 곧장 철퍼덕 엎드렸다. 다리는 가지 밖으로 대롱대롱. 온종일 침대 위에 엎어져서 일어날 생각을 않는 휴일의 내 모습 같았다. 한창 활동해야 할 청설모가 대낮에 저리 엎어지는 걸 보니 날이 덥긴 더운가 보다. 정말 여름 한가운데 들어섰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더니, 우린 옷깃을 스치진 않았지만, 눈빛을 스쳤으니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 잠깐의 만남으로 끝날 줄 알았던 청설모와의 조우가 그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신기하게도 본래 청설모는 주로 나무 위에서만 활동하는데 곰솔누리숲의 녀석은 내가 근무를 할 때면 지상으로 내려와 폴짝폴짝 풀숲 사이를 뛰어다녔다. 혼자 이어폰을 꽂고 숲을 정돈하고 있으면 발랄한 몸짓으로 시선을 빼앗곤 했다. 여기 좀 보라고 양손을 흔드는 것처럼 내 주위를 왔다 갔다 했다. 덕분에 근무하는 내내 외롭지 않고 좋았다.


 오늘도 만난 작고 소중한 나의 근무 메이트. 날씨가 서늘해지면서 먹이를 찾느라 무척 분주하다. 종종거리며 숲을 돌아다니는데 쪼그만 게 귀엽고 깜찍하다. 부들부들 부드럽게만 보이는 꼬리는 마치 안테나처럼 청설모의 움직임에 따라 주파수를 맞추듯 기민하게 움직인다. 몸집의 절반쯤 되는 긴 뒷다리로 뛰는 모습은 또 얼마나 날쌔고 민첩한지! 녀석을 발견할 때마다 사진이라도 한 장 남기고 싶은데 쉽지 않다. 휴대폰을 들어 카메라 앱을 터치하는 사이에 이미 저 멀리 달아나버린다.


 하지만 구태여 녀석을 쫓지 않아도 내 할 일을 하고 있으면 또 어디선가 나타난다. 잠시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데 낮은 언덕 너머로 녀석의 모습이 보인다.

 열매일까? 씨앗일까? 입안 가득 무언가를 물고 흙무덤으로 가더니 열심히 갈무리한다. 내가 지켜보는지도 모르고. 청설모는 가을에 가장 바쁘다. 겨울잠을 자지 않지만, 먹이 부족을 대비해서 가을에 나무에 달리는 잣이나 호두 등을 채취해 나무와 바위 틈새에 저장해두기 때문이다.

 부지런한 녀석을 보고 있으면 덩달아 나도 겨울을 대비해 무언가를 해둬야 할 것만 같다. 여름 내내 숲을 누비느라 홀쭉해졌는데 가을 동안 잘 먹고 두둑이 챙겨서 건강하게 겨울을 보냈으면 좋겠다. 너도,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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