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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 Dec 12. 2021

잠시만 안녕, 곰솔누리숲

근무지를 이동하게 되었다

 그림 작업하느라 새벽녘에 잠들어선지 아직도 꿈속을 걷듯 몽롱하다. 숲에 들어서도 어쩐지 생기가 돌지 않는다. 오늘은 숲도 고요하고 차분한 느낌이다. 나와 같은 기분인 걸까? 바람에 일렁이는 넝쿨 잎들이 끄덕끄덕 고갯짓을 하며 ‘나도 오늘은 좀 그렇다.’라고 공감해준다. 잔잔한 기운에 스며들 듯 가만가만 발걸음을 옮겼다. 집을 나설 때는 해가 머리 꼭대기를 비추며 나와 걸음을 나란히 했는데, 어느새 나보다 한 걸음 앞서 부지런히 하루를 걷는다. 뉘엿뉘엿 누워가는 햇살에 더 나른하다. 예전에는 시험공부 한답시고 학교 도서관에서 밤을 꼴딱 새워도 다음날 거뜬했는데 이제는 어림도 없다. 밤샘 작업을 하고 나면 그 시간만큼이 아니라 그 두 배의 시간만큼 자야 회복이 된다. 그 말인 즉, 지금 제정신이 아니란 얘기다.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온종일 뒹굴어야 하는데 출근을 했으니 말이다. 내가 사랑하는 초록도 몸과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보인다. 저질 체력 앞에서는 그저 스쳐 가는 수많은 장면 중의 하나일 뿐.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그동안 나름 직업인으로써 다져온 성실성을 힘껏 끌어올려 본다. 보폭은 넓게, 그에 맞춰 팔은 앞뒤로 크게 흔들며 정신을 차려본다. 몸이 축축 처질 때는 억지로라도 팔, 다리의 활동 범위를 넓히며 늘어지려는 세포를 일으켜 세운다. 때로는 토닥토닥 다정한 다독거림보다 시원한 등짝 스매싱이 멘탈을 잡는데 효과적이다. 아주 그냥 정신이 번쩍 들게 하니까. 지금 내게는 벼락처럼 내리치는 한 방이 필요하다. 스스로 등짝을 내리칠 수는 없으니, 파워 워킹으로 손끝 발끝에 자극을 팍팍 줘본다.



“지이이이이이잉 - 지이이이이이잉- ”


 옆구리가 간질간질하다. 주머니 속에서 가열차게 울리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에코뮤지엄 코디네이터님이시다. 코디님은 에코뮤지엄을 담당하시면서 여러 가지 행사나 운영을 기획하신다. 희망 일자리 근로자 관리도 함께하신다. 그래서 살짝 긴장되었다. 혹시 근무하는데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싶어서.


 “다음 주부터 갯골 소금창고로 출근할 수 있으실까요?”

 “어… 어, 네, 그럼요!”


 갑작스러운 근무지 이동 소식에 당황해서 말을 더듬어버렸다. 사실 근무지 이동은 예견된 일이었다. 에코뮤지엄 내에도 다양한 근무 장소들이 있는데, 처음엔 집과 가까운 갯골생태공원의 소금창고로 배정을 받았었다. 그런데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가 격상되면서 소금창고 전시관 개방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당분간 곰솔누리숲에서 함께 근무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옮겨가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쉬운 마음이 밀려든다.

  오늘은 조금 더 각별한 마음을 담아서 걸어야겠다. 이제 마음먹어야만 올 수 있을 테니까. 시선이 닿는 곳에 작별 인사를 하듯 하나하나 멈추어 본다.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까지 세 계절을 함께 하게 될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새삼 당연한 건 없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매 순간을 소중하게 아껴야 하는 이유다.




함께 계절을 걷는 동안 모두 한 뼘 넘게 자랐다. 초록도 더 짙어진 듯하고, 못 보던 예쁜 아이들도 눈에 들어온다. 매일 살펴보는 작품 틈에 꽃이 피었다. 이렇게 자랄 동안 왜 못 봤지? 무성한 이파리 사이로 쑥 올라온 꽃대. 꽃마을을 보니 조만간 샛노란 꽃이 활짝 펼쳐지겠다.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인데도 잘 자라주었네. 다행이다, 무심한 손길, 발길에 다치지 않아서. 아마 겨울이 오기 전 마지막 꽃들이지 않을까? 덩달아 나비도 분주히 꽃 나들이를 한다.


 자연을 따라 슬슬 겨울 준비를 해야겠지. 볼을 스치는 바람이 서늘한 걸 보니 서둘러야겠다. 선선한 바람이 머지않아 싸늘해질 것 같다. 안으로 에너지를 꽁꽁 싸매어야 추위에 흔들리지 않고 잘 버틸 수 있다. 숲은 어느덧 가을 한가운데.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에 짙은 초록의 솔잎이 더해지니 단어 그대로 ‘청명’하다. 깨끗하고 선명한 색과 결이 뿌연 마음을 닦아준다. 가라앉은 에너지를 일으켜 마음의 길을 걸어야겠다. 우리 각자의 계절을 열심히 걷다가 또다시 만나자.


 잠시만 안녕, 나의 곰솔누리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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