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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태 Oct 31. 2018

400번째 King Puck

2.38. 더블린-코크-킬로글린-워터빌

더블린 공항에 도착하니 밤 열시가 넘은 늦은 시간이 되어서 서둘러 예약한 호텔로 찾아 갔다. 도착 시간을 감안해서 일부러 공항 부지 안에 위치한 클래리온(Clarion)이라는 이름의 호텔을 예약했는데, 호텔이 있어야 할 위치에 클래리온 호텔은 없고 멀드론(Maldron)이라는 엉뚱한 이름의 호텔만 있다. 한참 동안 헤매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 클래리온 호텔 체인을 멀드론호텔이 인수해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한달 전 파리에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이번에도 출발부터 여지없이 헤매고 있다.  


애초에 2인실로 예약한 호텔이었기 때문에 중간에 권셰프가 추가되었을 때 3인실로 바꾸어야 했지만 미처 못해서 좀 걱정을 했었는데 호텔에 도착해서 물어보니 2인실에서 3인실로 바꾸는 것도 별 문제 없이 가능하다고 했다. 리셉션 직원 말로는 지금 더블린이 거의 모든 호텔의 예약이 가득 차 있어서 우리가 운이 좋다고 하는데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그런가 보다 했다. 


흔한 아일랜드 도로 풍경


그 동안 와이프와 다니다가 갑자기 셋이 같이 자는 바뀐 환경에 적응하려니 좀 어색했는데 이런 어색함을 없애는 데는 역시 술이 최고다. 두 남자가 이제 막 도착했으니 당연히 각종 술에 안주에 먹을 것이 아주 많아서 오랜만에 한국 술과 안주를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서로간의 어색함도 많이 없앨 수 있었다. 


오랜만에 취해서 잠을 자려는데 정차장이 코를 심하게 골았다. 코를 곤다는 얘긴 들은 거 같았지만 생각보다 소리가 커서 앞으로 여행이 좀 걱정되기도 했다.


여행 후반부를 함께한 정차장과 권셰프


다음날 아침 예약한 렌터카를 찾기 위해 Sixt 렌터카를 찾아 갔다. 공항 입국장 쪽이면 픽업을 부르면 되지만 거기까지 가는 거리도 꽤 멀었기 때문에, 운동 삼아 걸어서 찾아가기로 했는데, 생각보다 찾기 어려워서 한참이 걸려서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예약한 차는 무조건 제일 싼 차였지만 그보다는 높은 등급의 토요타 코롤라를 받았는데 부드럽고 가속력도 좋은 거 같아서 만족스러웠다. 이렇게 차량 수배에 따라 현장에서 높은 등급으로 차를 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일단 싸게 예약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찾은 후 알디와 테스코에서 장을 보았다. 앞으로 먹고 살 것들을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요리용 가스를 사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는데 여기서도 구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중에 찾아 보기로 하고 아일랜드에서의 첫 번째 목적지인 코크(Cork)를 향해 출발했다.


캐리 순환도로 모습


아일랜드에서의 여행 루트는 먼저 남서쪽의 절경으로 일컬어지는 캐리 순환도로(Ring of Kerry)를 돌아보고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서 자이언츠 코즈웨이를 보고 다시 더블린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계획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남쪽 끝에 있는 코크로 가야 하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에서 부산 가는 것과 비슷한 정도 거리로 고속도로를 타고 가야 했다. 


세 명 모두 운전은 할 수 있지만 수동 기어는 익숙치 않은데다가 처음으로 왼쪽 편으로 운전하는 것이어서 당분간은 내가 운전을 전담하기로 했다. 나만 믿으라고 큰소리치긴 했지만 막상 운전하려니 좀 불안하기도 해서 익숙해질 때까지 좀 시간이 필요할 듯 했지만, 우리에게 그런 여유는 없었기에 무작정 고속도로를 향해 내달렸다. 


캐리 순환도로는 아일랜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장 멋진 여행지로 추천해주는 곳이라고 하는데, 아일랜드 남서쪽의 캐리 지역의 해안을 따라 이베라 반도 안의 180km 정도의 순환도로로 호수, 강, 산, 바다, 절벽 등 짧은 시간에 다양한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냥 한 바퀴 도는 시간은 두 시간 반 정도이지만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면서 돌다 보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 곳이라고도 한다.


아일랜드의 도로는 좁고 나무나 풀들이 닿기 십상이어서 조심해서 운전해야 한다


왼쪽 차선으로 운전하는 것은 예상대로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처음에는 기어 변속도 어려워서 헤매었지만 반나절 정도 지나니까 적응이 되기는 했는데, 그래도 급할 때는 여전히 허공에 손을 허우적대곤 했다. 


특이한 점은 기어나 운전대, 계기판 등 모든 것의 좌우가 바뀌어 있었지만 방향지시등은 한국에서와 같이 왼쪽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왼손으로 핸들을 잡으면서 손가락으로 방향지시등을 조작하면 되지만 여기서는 왼손으로 기어를 잡아야 하므로 방향지시등과 기어를 동시에 조작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뭔가 불편한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일 걱정한 것이 습관적으로 별 생각 없이 우회전을 하다가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는데, 이곳에서는 우회전이나 좌회전이나 모두 비보호여서 별 생각 없이 우회전하는 일은 없었다.


성 핀바르 성당. 그리스 정교 성당의 느낌이다.


코크는 조그마한 항구도시였는데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온 터라 일단 도착한 후 도시 가운데로 짐작되는 곳에 높이 솟아있는 첨탑이 있는 곳으로 가 보았다. 오래된 유럽도시의 중심부에는 대부분 성당과 광장이 있고 가장 볼만한 곳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가까이 가 보니 광장은 없었지만 역시 성 핀바르 성당 (St. Finbarre's Cathedral)이라는 성당이 있다. 



서유럽의 성당들과는 많이 다른 듯한 느낌으로 예전에 핀란드나 러시아에서 보았던 그리스 정교 식 성당과 많이 닮은 듯하다. 규모가 크지 않은 성당을 둘러본 후 멀지 않은 해변에 위치한 캠핑장에서 자기로 하고 바로 이동했다. 


갑자기 어느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오길래 무작정 들어가 봤다.


한참을 가던 중 킬로글린(Killorglin)이라는 마을을 지나는데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차를 세우고 어디론가 가는 모습을 보았다. 뭔가 재미있는 것이 있나 싶어서 우리도 차를 세워놓고 따라가 보기로 했다. 


한참을 걸어가는데 앞서가던 권셰프가 길가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보고 멈춰 서서 킥킥대고 있길래 가까이 가 보았더니 염소 한 마리가 그려져 있고 아래에 퍽페어(Puck fair)라고 써 있는 포스터였다. 세상에 별 페어가 다 있다고 서로 한참 웃다가 좀더 걸어가봤더니 아까 그 포스터가 마을 축제를 알리는 포스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퍽이 아마도 염소를 가리키는 말 같은데 마을 입구의 다리 앞에는 왕관을 쓴 염소의 동상도 있는 것을 보니 뭔가 이 마을이 퍽과 관계 깊은 곳인 듯싶다. 


킬로글린 마을 전경


조그만 마을 규모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축제를 즐기고 있었는데 어릴 때 내가 자랐던 강릉에서 보았던 단오제의 느낌과도 비슷하다. 남대문 시장을 옮겨놓은 것 같이 잡상인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것도 비슷한데, 사람들이 맥주 한잔씩 들고 돌아다니며 얘기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은 좀 다른 풍경이었다. 


킬로글린 마을 입구에 있는 King Puck 동상


마을 가운데 높은 곳에 살아있는 염소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는데, 킹퍽(King puck) 즉 올해의 염소로 뽑힌 놈이라고 한다. 


옆에 있던 마을사람인 듯한 청년에게 “축제가 끝나면 저 퍽은 잡아 먹나요?” 라고 했더니 깜짝 놀라며,

“그럴 리가 있나요, 풀어 줘요” 라고 말은 하지만 왠지 스스로도 자신이 없는듯한 말투이다.


Puck Fair의 주인인 King Puck.  높은 곳에 갇혀 있어서 불쌍해 보였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퍽은 숫염소를 가리키는 아일랜드 말이고 퍽페어는 이곳 킬로글린에서 매년 펼쳐지는 최고의 숫염소를 가리는 축제인데, 아일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축제라고 한다. 


무엇 때문인지 이곳에서는 염소가 주인이고 사람이 두 번째라고 말할 정도로 염소를 귀하게 여겨지고 있었는데, 올해는 그 400주년이 되는 해로 다른 때 보다 더 성대하게 축제가 펼쳐지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축제를 보러 온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축제에서는 공중에 매달인 염소 말고도 볼 것이 많았다. 다양한 거리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공연이라기 보다는 동네 사람들끼리 모여서 아이들의 재롱을 보고 박수 치며 즐기고 있는 편에 가까웠다. 


축제에서 맥주 한잔씩 들고 있는 사람들과 얘기를 해 봤지만 스코틀랜드 억양이 강한 영어는 잘 알아듣기 힘들었다. 


마을 주민들이 축제에서 탭 댄스 추는 소년을 응원하고 있다.


축제 때문에 길이 막혀서 돌아가느라 예정된 시간보다 한참을 늦어서 캠핑장에 도착 했다. 이곳 캠핑장은 바닷가에 위치해서 멋진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었으나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부는데다가 너무 춥고 밤새 비가 오다 말다 해서 영 힘들게 잠들어야 했다. 


재미있는 것은 캠핑장 식당 옆에 있는 거실에 사람들이 모여서 기타를 치며 노래하고 있었는데 마치 중학교 시절 하계 수련회에서와 같은 건전하고도 가족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다들 착하고 순수한 모양이다.  


바닷가에 위치해서 바람이 엄청났던 캠핑장


다음날 일어나서 캐리 순환도로를 아래쪽으로 돌아서 갔다. 어제 캠핑장에서 보았을 때 바다 건너편에 멋진 성의 폐허가 있는 것을 보고 오늘 가까이 가 보기로 했다. 발리카베리성(Ballycarberry Castle)이라는 이름의 성인데, 일부러 복원하지 않고 폐허 그대로 두는 것도 세월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아일랜드에는 어딜 가나 이렇게 이름 모를 폐허가 된 성이 많았다.


발리카베리 성의 폐허


성 밑 한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가 봤더니 여자 하나가 발을 헛디뎠는지 누워서 죽는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고, 사람들은 별로 서두르는 기미도 없이 그 여자를 둘러싸고 어떻게 해야 할지 토론하고 있는 듯 하다. 


왠지 순박하기는 하지만 여유가 지나친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달려서 남서쪽 끝 해변에 위치한 워터빌(Waterville)에 도착했는데 바닷가에 뜬금없이 찰리 채플린의 동상이 있어서 뭔가 싶었다. 


채플린은 미국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왜 이런 곳에 동상이 있는 것인지 궁금했는데, 사연을 찾아보니 채플린이 가족과 함께 우연히 이곳에 왔다가 마을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매년 워터빌을 방문했다고 하고, 마을에서도 그를 기념해서 동상을 세워 준거라고 한다. 낯선 곳에서 낯익은 얼굴을 보니 반가웠다. 


역시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채플린 동상을 만나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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