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 네스호-어커트성
한참을 바람을 맞으며 달리다 보니 미찌로 부터 받은 충격이 좀 진정이 되는 거 같아서 포트리(Portree)라는 마을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영국의 유일한 전통 음식이라는 피시앤칩스(fish & chips)를 도착한날 휴게소에서 먹어보긴 했지만 식당에서 제대로 다시 먹어보고 싶어서 괜찮아 보이는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주인 아주머니가 직접 서빙하는 식당이었는데 피시앤칩스와 다른 스코틀랜드 전통음식을 추천해 달라고 해서 시켜 먹었다.
전에도 느낀 거지만 우리가 잘 모르는 전통음식은 어지간하면 안 먹는 게 낫다. 유명하지 않은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스코틀랜드 전통 음식도 양으로 만든 것과 순대 비슷한 것이 몇 가지 나왔는데 냄새가 역해서 별로 먹을만하지 않은 음식이었다. 아마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순대 같은 음식을 먹으면 비슷한 기분이겠지. 피시앤칩스는 생선 튀긴 거에 감자튀김을 곁들인 단순한 음식이지만 꽤나 맛있는 괜찮은 조합인 거 같았다.
이때부터 우리가 직접 잡은 고기로 피시앤칩스를 만들어 먹는 것이 우리의 로망이 되었는데 물고기를 잡으면 바로 만들 수 있게 감자를 항상 가지고 다녔지만 우리의 로망이 실현되기까지는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다.
식당 주인 아주머니는 약간 차가워 보이는 전형적인 영국 아주머니였는데 지금도 날씬한 것이 젊었을 때는 꽤나 날렸을 거 같은 인상이었다. 아주머니와 얘기를 하게 되어서 미찌에 대해서 물었더니 안다며 불쌍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래 절래 젓는다. 이렇게 많이 물렸는데 괜찮겠냐고 물었더니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앞으로의 여행 일정이 어떻게 되죠?”라고 묻는다. 무슨 말인지 몰라서 잠시 멍해 있으니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2~3일 안에 비행기를 탈 계획이 있나요?”라고 묻길래 그제서야 ‘아차, 비행기를 타면 안 되는 건가?’ 싶어서
“낼 모레 아이슬란드로 가야 하는데, 비행기를 타면 무슨 문제라도 생기나요?”라고 되물었더니
“Nothing.”
이라고 쿨하게 말한다.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쳐다봤는데 피식 웃는데, 이런 게 스코틀랜드식 유머인가보다. 세상은 넓고 이해할 수 없는 유머도 많다.
식사를 마치고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셨는데 일하는 아가씨들이 너무 예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권셰프의 위시 리스트에 또 한 곳이 추가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몇 일 전에 지났던 도난 성으로 다시 돌아왔다. 성 주차장에는 커다란 모터사이클을 타고 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아마도 우리로 치면 할리 데이비슨 동호회 정모 같은 것을 하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오토바이 타는 사람들이라면 폭주족을 생각하기 쉽지만 이곳에서는 대부분 나이들이 꽤나 있는 사람들이다. 비싼 모터사이클에 방호복을 제대로 갖춰 입고 있어서 나름 한 자세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마치 007과 동료 요원들이 모여 서있는 듯한 느낌이다.
라이더 아저씨들을 구경하다 보니 옆에 있는 다리 위에서 어떤 아저씨가 낚시를 하고 있는 것이 보여서 구경을 가 봤더니 고등어를 한 마리 낚았다고 한다. 우리끼리 아무데서나 낚시를 하다 보니 고기는 못 잡고 시간만 낭비한 터라 누군가 낚시하는 사람을 보기 전까지는 낚시를 안 하기로 약속했었는데 낚시꾼을 발견했으니 우리도 재빨리 차에서 낚시대를 꺼내와서 캐스팅을 해 보았다.
시원한 바다 바람을 맞으며 멀리 캐스팅하는 기분은 상쾌했지만 이번에도 아무 소득이 없었다. 우리의 로망은 언제쯤 이루어질 수 있을지 막막할 따름이었다.
다음 행선지는 네시 괴물로 유명한 네스호이다. 네스호는 괴물이 나온다는 얘기 말고도 깊기로 유명한 호수인데 길쭉한 형태의 호수에 담긴 물의 양이 영국 다른 담수호의 물 양을 다 합친 거 보다 많다고 한다.
네스호는 바람도 많이 불어서 물결도 많이 치고 날씨의 변화도 심해서 괴물이 나타난다 해도 별로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혹시 고기가 잡힐까 해서 낚시대를 던져봤지만 여기서도 아무 것도 낚을 수 없었다. 그냥 네스호에서 낚시를 했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할 거 같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 지고 있었기 때문에 근처에 캠핑장을 찾아서 캠핑을 하기로 했다. 이 캠핑장은 농장을 개조해서 만든 것이었는데 리셉션이 마구간 옆이어서 그런지 말똥 냄새가 진동했지만 다행히 텐트 치는 잔디밭은 괜찮았다.
바람이 많이 불기는 했지만 미찌는 없는 거 같아서 다행이었다. 이젠 잔디밭만 보면 덜컥 겁이 날 지경이 되었다. 텐트 장 옆에 넓은 밭 같은 것이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거기에 갈매기가 수 백 마리가 앉아 있었다. 물이나 모래밭이 아닌 밭 위에 앉아서 쉬고 있는 갈매기 떼거지는 꽤나 낯선 풍경이었다.
텐트를 치고 있는 프랑스 여자애를 우연히 만나서 얘기를 나누었는데 100km 정도 운하를 따라서 걷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운하를 따라 걷는 트래킹은 들어본 적이 없는지라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모르는 다양한 여행 방식이 있나 보다.
우리 텐트 옆에는 나이든 커플이 텐트를 치고 있었는데 캠핑인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와인 잔으로 격조 있게 와인을 마시며 서로에 대한 깊은 애정 표현을 하는 광경이 참 보기 좋았다. 설마 불륜이나 뭐 그런 건 아니겠지?
오늘도 낮에 고기와 술 등 몇 일 동안 먹을 음식들을 장봐 왔지만 결국 먹다 보니 장 본걸 다 먹어 치워 버렸다. 얼만큼을 사던 간에 술을 먹기 시작하면 거의 그날 다 먹어 치우는 거 같다.
우리 옆에 캠핑카가 있었는데 한국인 가족이 타고 있었다. 부모는 못 봤고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매가 놀고 있길래 정차장이 말을 걸어봤는데 수원 어디쯤이 집이라고 한다. 정차장 집이 안양이라서 반갑다고 더 말을 걸려고 했지만 아이들이 그냥 지들끼리 놀고 상대를 안 한다. 아마 조그만 차에 텐트치고 다니는 우리가 뭔가 레벨이 떨어지는 족속들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베니스에서 만난 귀여운 남매와는 정 반대 느낌의 아이들이다. 정차장은 아이들한테도 무시 당한다고 투덜거린다.
술과 고기를 잔뜩 먹고 자는 오늘 밤에도 역시나 비가 내린다. 스코틀랜드에 와서는 밤에는 거의 비가 오는 거 같다. 그래서 그런지 잠을 자도 뭔가 푹 잔 느낌이 별로 없고 삭신이 쑤시는 게 나이 먹고 다시 하기는 쉽지 않은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텐트도 완전히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접어 넣어야 했기 때문에 항상 축축한 상태로 있었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다음날 어커트 성 구경을 갔다. 네스호에 면한 어커트 성은 다른 스코틀랜드의 성들처럼 거의 다 부서지고 잔해만 남아 있는데 규모가 상당히 큰 성이었는지 잔해도 꽤나 멋있게 남아있다. 사실 별로 비싼 돈 내고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네스호에서는 그나마 볼만한 유적이 이 정도라서 어쩔 수 없이 들어가 보았다.
네스호를 지나는 사람들은 한번씩 다 오는지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로 성 안이 북적댄다. 이정도 규모의 성이면 우리나라 같으면 예전에 복원했을 거 같은데 이곳에서는 복원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하다. 대신 오래 전에 어커트성을 둘러싸고 펼쳐졌을 공성전을 재현한 듯 투석기와 같은 옛날 무기들이 있어서 흥미로웠다.
어커트성 자체를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이 곳은 네스호를 바라보며 괴물이 나오는지 감시하기에도 아주 좋은 위치에 있다. 성에서 바라보는 네스호는 거친 파도와 음산한 분위기로 금방이라도 괴물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