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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태 Nov 15. 2018

쓸쓸한 칼튼힐

2.44. 에든버러

다시 에든버러를 향해 이동했다. 그런데 길 옆으로 전봇대 같은 곳에 표지판이 하나씩 붙어 있는 것이 신기했다. 대부분 ‘Yes’라고 쓰여진 표지판이고 가끔씩 ‘No, thank’도 간간히 보였다. 


저게 뭘까 곰곰히 생각하다가 왠지 분리독립 투표를 독려하기 위한 거 같았다. 그때는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투표에 관한 뉴스가 본격적으로 보도되기 몇 달 전이라서 순전히 추측한 건데 에든버러에 가서 확실히 그런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분리독립 찬성 반대 포스터가 사이좋게 붙어있다

우리가 본 표지판은 Yes가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나중에 투표 결과는 독립 반대로 나온 걸 보면 여기도 침묵하는 다수가 꽤 있나 보다. 


윌리엄 윌리스가 화형 당하면서 프리덤을 외치던 그 시절로부터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서일까? 따지고 보면 우리가 한일 합방으로 일제 식민지로 있었던 것이나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 합병되어 있는 것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고유의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있고 생긴 것도 좀 틀린 사람들인데 우리가 만일 1945년에 해방되지 않고 몇 백 년이 흐른 후 투표로 독립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면 스코틀랜드 사람들이랑은 다른 선택을 할까? 아마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바람과 구름과 안개. 스코틀랜드의 상징적 풍경이다.


운전을 하던 중에 이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유명한 하일랜드 소를 봤다. 보통 소들보다 뿔이 더 길고 날카로우며 두껍고 긴 털이 날리는 것이 뭔가 포스가 있어 보인다. 소 털은 두껍고 기름기가 있어서 비바람이나 눈이 와도 물이 스며들지 않고 보온성이 뛰어나다고 한다. 일반 소들이 먹지 않는 거친 풀들도 잘 먹어서 하일랜드에서 키우기는 딱 맞는 조건인 거 같다.


가까이 가 보니 스코틀랜드 전통 소답게 성깔도 만만치 않아서 가까이 가면 이상한 숨소리를 내며 위협한다. 생긴 것이 히말라야나 티벳 고원지대에 사는 야크와 비슷한데, 아마 사는 환경이 비슷하면 서로 닮나 보다. 


하일랜드 소는 스코틀랜드보다 더 추운 겨울이 오래가는 캐나다나 동부 유럽에서도 완벽하게 적응할 수 있어서 적지 않은 숫자의 하일랜드 소가 북미대륙으로 수출되었다고도 한다.



몇 일 만에 에든버러로 돌아오니 집에 돌아온 거처럼 반가운 마음이 든다. 모튼홀(Morton hall)이라는 시내에서 좀 떨어진 곳의 캠핑장에 텐트를 쳤는데 별 네 개짜리 캠핑장이라서 그런지 당구장, 오락실을 포함해서 다양한 시설들이 있었고 텐트 치는 잔디밭도 엄청나게 넓었다.


캠핑장 안에 당구장도 있다


텐트를 쳐 놓고 버스를 타고 에든버러 시내로 가기로 했는데 바람이 너무 불어서 갔다 온 사이에 텐트가 뽑혀서 날아갈 거 같은 걱정이 들어서 팩도 더 박고 끈으로 단단히 묶어 두어야 했다. 시내로 가는 버스는 이층버스였는데 정차장과 권셰프는 이층버스가 처음인지 꽤나 즐거워했다. 


우연히 만난 한국인 공연자


시내공연이 펼쳐지는 곳으로 찾아가는 길에 건널목에서 신호를 잠시 기다리며 이 여자가 어떻고 저 여자가 어떻고 하는 얘기를 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한국에서 오셨나 봐요?”


라고 묻는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깜짝 놀라서 뒤돌아보니 어떤 아주머니가 한국말로 말을 건다. 반가워서 얘기를 해보니 미국에서 오셨다는데 에든버러에서 1인 뮤지컬 공연을 한다고 하시면서 보러 오라고 하셨다. 


외국이라고 맘놓고 아무 얘기나 하고 다니는데 자나깨나 말조심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분 같던데 공연이 잘 되어서 성공하셨으면 좋겠다.


에든버러성 풍경


에든버러 페스티벌 공연을 홍보하는 포스터들


거리 공연은 지난번 봤을 때랑 큰 차이는 없었는데 날씨가 우중충하고 비가 떨어지고 있어서 좀 처지는 느낌이었다. 거리 공연자 중 이런 저런 기구로 저글링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뭐 돌리는 것도 시원찮고 사람들 반응도 시큰둥하니까 갑자기,

“나의 비장의 기술을 보여드리죠.” 라고 하더니 쇠구슬 세 개를 꺼내서 자신의 허리 아래 부분에서 돌리면서, 

“5-ball 저글링!!”이라고 외친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역시 스코틀랜드식 유머는 종잡을 수가 없다.


에든버러에서 만난 인도 음식점


길거리 공연을 보는 중에 비가 너무 와서 비도 피할 겸 식당을 찾다가 인디안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다른 식당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오래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그나마 금방 자리가 나는 곳을 찾다 보니 에든버러에 와서 뜬금없이 인도 식당에서 밥을 먹게 되었다. 


서빙하는 사람들이 전부 인도사람들이었는데 하나같이 다 영화배우처럼 예쁘고 잘생겼다. 그 중 한 명은 프리즌 브레이크에서 주인공의 형으로 나왔던 배우랑 매우 닮아서 왠지 사인을 받고 사진을 찍고 싶을 정도였다. 


대단한 열정으로 빗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연하는 분들


아일랜드에서 온 공연팀. 마치 고향사람들을 만난 기분이다


클라우드 아틀라스에 나왔던 스콧 기념비(Scott monument)

 

저녁 시간이 되어서 집으로 가는 길에 스콧 기념비를 지나게 되어서 위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현금이 모자라서 그냥 가기로 했다. 


권셰프가 잠시 자리를 비워서 정차장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는데 둘 다 소변이 급해서 화장실을 찾아서 지하로 내려가다 보니 위블리 기차역까지 가게 되었다. 그런데 역 안에 있는 화장실이 인당 30페니씩 내야 하는 유료 화장실이었다. 


둘이 잔돈 가진 것을 다 긁어도 54페니 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둘 다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 명이라도 몰아주기로 할까 하다가 그냥 참기로 했다. 정신력으로 버텨서 캠핑장으로 돌아 올 때까지 참을 수는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소변도 못 본다고 생각하니 웃기기도 하고 좀 서글픈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행히 텐트는 안 날라가고 잘 버티고 있었다. 


에든버러의 야경. 어딘지 쓸쓸한 느낌이다.


밤새 바람소리 때문에 잠을 설치고 찌뿌둥한 몸으로 일어났다. 오늘은 아이슬란드로 떠나는 이동일이다. 공항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짐을 전부 다시 싸고 에든버러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칼튼힐(Carlton Hill)로 갔다. 


칼튼힐에는 천문대를 비롯해서 파르테논 비슷한 짓다 만 신전 유적 등 많은 볼거리가 있다. 예전에 뭔가 멋진 건물을 지으려고 돈을 모아서 짓다가 자금이 부족해서 짓다 만 거라고 하는데 그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다.

칼튼힐 자체에도 볼거리가 많지만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꽤나 멋지다. 


아서의 자리


한쪽에는 영국 여왕이 오면 머문다는 왕궁과 함께 아서왕이 자신의 군사들을 내려다 보았다는 아서의 자리(Athur’s seat)가 있는 홀리루드 공원(Holyrood park)이 있고, 반대쪽에는 스콧 기념비를 비롯한 에든버러 시내 경치가 펼쳐지고 있다. 


또 한쪽은 북해에 면해 있어서 다양한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는 곳이다. 한 중국인 아가씨가 점프샷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자세가 범상치 않다. 한쪽 다리를 들어서 귀에 붙인다던가 허리를 역 C자로 꺾으며 점프 한다던 지 하는 고난도의 묘기를 보여주어서 구경하던 우리는 아낌없는 박수를 쳐 주었다. 


엄청나게 넓은 캠핑장. 바람이 너무 세서 텐트가 날라가지 않을까 걱정했다.


공항으로 가기 전에 데카트론에 들렀다. 정차장이 가진 침낭이 너무 얇아서 추가로 침낭을 하나 더 사고 낚시대도 하나 샀다. 한국에서 싸구려 낚시대를 사왔더니만 고기를 본격적으로 낚기도 전에 부러져버렸기 때문이다. 


공항 근처 허츠로 와서 렌터카를 반납했다. 뒷 범퍼에 부딪친 흔적이 있어서 좀 걱정했는데 수퍼커버라서 문제 없다고 하며 사고 경위서만 쓰라고 한다. 자세히 쓰기도 귀찮아서 그냥 ‘후진하다 박음’ 이렇게 쓰고 반납을 끝냈다. 


반납차량을 검사하는 사람이 최근 007의 배우인 다니엘 크레이그를 닮은 야성미 넘치는 아저씨이다. 또다시 사인 받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거리에 서있는 입간판에 ‘당신의 한 표를 썩히지 마십시오’ 이런 얘기가 써있길래 보니까 분리독립 투표 얘기였다. 추측이 맞았던 것이다.


쓸쓸한 칼튼힐 풍경


공항 검색대에서 정차장이 걸려서 짐을 다 풀어헤쳐야 했다. 정확히 뭣 때문에 걸렸는지 잘 모르겠는데 속옷에 먹을 것에 사람들 보는 곳에서 다 까발려야 했기 때문에 정차장이 좀 열을 받는 눈치다. 


그래도 검사하는 출입국 직원이 기분 안 상하게 하려고 농담도 해가면서 재미있게 하려고 하는 점은 그나마 보기 좋았는데, 첨에는 아시안이라고 차별하나 싶었는데 옆에 영국인 아가씨 세 명도 걸려서 씩씩거리고 있는걸 보니 그런 이유는 아닌 거 같다. 아니면 아시안과 영국인을 차별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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