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 레이캬비크-싱벨리어-고다포스-게이시르
드디어 월터의 상상이 현실이 된 곳, 아이슬란드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아이슬란드의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나무나 숲 같은 푸른 색은 전혀 안보이고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울퉁불퉁한 갈색의 용암 바다만 온 대지를 가득 채우고 있다. 공항에 착륙하니 차가운 공기가 제일 먼저 와 닿는다. 8월 중순이지만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 괜히 얼음의 땅이 아닌 모양이다.
사실 아이슬란드는 이름처럼 얼음으로 뒤덮인 곳이 아니라 대부분 흙으로 된 섬이고, 반대로 그린란드는 이름과는 달리 거의 얼음으로 뒤덮인 곳이다. 옛날 이곳을 찾은 바이킹들이 아이슬란드 땅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 관심을 못 가지게 하고 그린란드로 관심을 돌리려고 일부러 이름을 반대로 지어서 그렇게 된 거라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수준의 얘기다.
그 동안 사용한 모바일 무제한 유심을 아이슬란드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항에서 보다폰 유심을 사서 끼웠다. 유럽에서는 이렇게 아무데서나 유심 카드를 사서 끼우면 바로 통화할 수 있어서 여러모로 편하다.
다음은 렌터카를 찾을 차례인데 사실 도착 전부터 제일 걱정이 되었던 것이 렌터카였다. 워낙 렌트 비용이 비싸다 보니 아이슬란드에서 그간 렌트한 차 중에 제일 작은 차종을 빌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는 그나마 예약한 것 보다 큰 차를 줬는데도 짐을 차에 쑤셔 넣느라 힘들었는데, 아이슬란드에서 받을 차는 예약한 중에서도 가장 작은 경차 수준의 차였기 때문에 혹시나 예약한 것 보다 큰 차를 받기만을 기대했다.
싼 렌터카 업체를 찾다 보니 잘 못 들어본 그린모션이라는 브랜드의 렌터카 회사를 이용했는데 역시나 일 처리 하는 게 영 시원찮다. 공항에서 렌터카 사무실까지 밴을 타고 이동했는데 같이 타고 이동한 가족은 커다란 사륜구동 차를 렌트하는 것을 보니 좀 기가 죽는 느낌이다. 나중에 느낀 거지만 아이슬란드를 제대로 보려면 험지를 갈 수 있는 사륜구동 SUV가 필수인 것 같다.
드디어 기다리던 우리 차가 나왔는데 혹시나 하는 기대와는 달리 계약한대로 조그마한 경차 같은 차가 나왔다. 현대 I10이란 모델로 역시 한국에서는 못본 차인데 조그마한 트렁크와 뒷좌석에 짐을 쑤셔 넣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기본 보험에서 자갈 옵션을 추가했는데 아이슬란드에서는 거의 필수로 들어야 하는 옵션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아이슬란드는 우리나라 제주도처럼 생겼는데 크기만 한 열 배쯤 튀겨놓은 듯한 느낌이다. 화산에 의해 만들어진 점도 비슷하고 검은 화산석이 많은 것도 비슷하다.
해안을 따라 일주하는 도로가 1번 국도인데 우리나라로 치면 경부고속도로 정도 되는 주도로이다. 그런데 1번 국도마저도 포장이 안된 자갈길 구간이 꽤 있을 정도이니 내륙의 도로는 거의 포장이 안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이런 내륙 도로로 가려면 반드시 사륜구동 SUV가 필수이고 우리 같은 세단은 기껏해야 해안을 따라 도는 정도만 가능했다. 사실 우리 차로는 해안만 따라 돌기도 버겁긴 했다.
1번 국도만 따라가도 기가 막힌 절경들이 널려 있긴 하지만 나중에 꼭 한번 다시 오게 되면 사륜구동을 타고 내륙을 돌아다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아이슬란드를 떠나는 비행기 옆자리에 앉았던 아저씨가 아이패드로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보고 있었는데, 아마도 내륙을 여행한 듯 사진들이 기가 막힌 절경들로 가득 차 있어서 다시 한번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일주일 정도 기간 동안 1번 도로를 따라 아이슬란드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 도는 단순한 코스로 여행하기로 했다. 사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는 여행 루트를 짜는 것이 좀 스트레스였다.
워낙 여행 기간이 길어서 사전에 루트를 확실히 정하지 않고 왔기 때문에 2-3일 후에 갈 곳을 계속해서 생각하면서 다녀야 했다. 하지만 아이슬란드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1번 국도를 따라 돌다 보면 유명한 포인트가 다 나왔기 때문에 그냥 오른쪽에 바다를 두고 계속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미리 예약한 공항 근처 게스트하우스로 갔는데, 예약한 트리플 룸이 없다고 더블룸 두 개로 준다. 정차장과 권셰프가 한방을 쓰기로 하고 나는 오랜만에 독방에서 잘 수 있었다. 얼마 만에 지붕 밑에서 자보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독방으로..
게스트하우스 부근은 허허 벌판으로 지금까지 봐왔던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삭막한 느낌이다. 바깥 바람도 차가워서 이런 데서 캠핑을 할 수 있을 지가 심히 걱정될 지경이다.
공동 주방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프랑스 부부가 자기들은 내일 떠난다며 우유나 빵 같은 남은 음식들을 먹으라고 준다. 게다가 주방에 그 전 손님들이 먹으라고 남기고 간 여러 가지 것들이 많아서 최대한 많이 챙겼다.
식당 벽에 게스트하우스에서 보게 되는 10가지 풍경이라는 제목의 재미있는 글이 붙어있었다. 첫 졸업여행인 것처럼 시끄럽게 떠드는 미국인들, 20대인 척하는 38세 아저씨 - 이 대목에서 약간 찔렸다 - 이 나라가 81번째 여행국이어서 모든 것이 심드렁한 미국 아가씨 등등.. 10번째 중 마지막은 미소로 당신의 나머지 인생을 함께 하게 될 유럽 아가씨였다. 재미있고 공감 가는 글이다. 부디 권셰프가 10번째에 해당되는 아가씨를 만나야 할텐데..
식사를 마치고 각자 방으로 들어가서 쉬기로 했다. 샤워를 하려고 물을 틀었는데 뜨거운 물이 안 나왔다. 찬물만 나오나 싶었는데 이 추운 나라에서 그럴 리 없다 싶어서 한참을 들여다 보다 겨우 방법을 알아내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할 수 있었다.
각 나라마다 수전 기구들의 방식이 달라서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기분 좋게 샤워를 마치고 쉬고 있는데 정차장이 문을 두드린다. 나가보니 권셰프가 뜨거운 물이 안 나와서 30분째 쭈그리고 있으니 어떻게 좀 해보라는 얘기였다. 가보니 역시나 불쌍하게 홀딱 벗고 욕조 안에서 추위에 떨고 있길래 더운 물이 나오게 해 줬다. 이때만큼 권셰프가 나에게 고마워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앞으로 오랫동안 빨래를 하기 힘들 것이었으므로 오랜만에 빨래를 하기로 했다. 건조기가 따로 있어서 금방 말려서 입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9시반 쯤 되니 해가 졌다. 겨울에 왔으면 오로라를 볼 수 있었을 텐데.. 기후나 풍경 모두 낯선 곳에서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오랜만에 포근한 침대에서 혼자 잠을 청하려니 뭔가 어색하다. 야생의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 있나 보다. 문득 와이프가 보고 싶어졌다.
게스트하우스를 출발했다. 차나 커피가 공짜라 마지막으로 맘껏 마시고 레이캬빅에서 가장 크다는 스마라린드(Smaralind) 쇼핑몰로 이동했다. 그 동안 다녔던 곳들은 맑은 날씨라고 해도 뭔가 습기를 머금은 날씨인데 이곳은 그야말로 눈이 시릴 정도로 쨍하게 맑은 날씨이다. 스마라린드는 역시나 큰 쇼핑몰인데도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그 동안에 보았던 사람들과 많이 다른 느낌이다. 러시아 계통으로 보이는 백발에 가까운 금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뭔가 에스키모 느낌이 있는 사람들도 있다. 몇 일치 먹을 것과 1회용 바비큐 그릴, 가스 등을 샀다. 물가는 역시나 매우 비싼 편이다.
오늘은 골든 트라이앵글을 둘러볼 계획이다. 아이슬란드 여행자 중 상당수가 이곳만 둘러보고 갈 정도로 아이슬란드를 대표하는 여행지인데 싱벨리어와 고다포스, 게이시르가 이루는 삼각형을 두고 골든 트라이앵글이라고 말한다. 계곡과 폭포, 간헐천 등 아이슬란드에 널려 있는 볼거리 중 대표적인 것만 볼 수 있는 곳들인데 수도인 레이캬빅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아서 하루 코스로도 둘러볼 수 있는 여행지 들이다.
제일 먼저 싱벨리어를 향해 출발했다. 싱벨리어는 두 가지로 유명한 곳인데 첫 번째는 이곳이 아이슬란드의 초기 개척자들인 바이킹들이 회합을 통해 아이슬란드의 국가 체제를 다진 핵심 활동지라는 점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회라고도 할 수 있다고 한다.
두 번째는 이 곳이 두 대륙의 경계선이라는 것이다. 지구의 지각은 여러 개의 판으로 이루어져 있고 지금도 판들이 조금씩 이동하고 있는데 판들의 경계선에서는 사이가 멀어지는 곳도 있고 서로 충돌하는 판들도 있어서 여러 가지 지각 변동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대서양의 한 가운데 바다 깊숙한 곳에는 대서양 중앙해령이라는 남북으로 수천 킬로 길이의 산맥이 있는데 이곳이 유라시아판과 북아메리카판이 갈라지는 곳이다. 그런데 이 대서양 중앙해령이 물 밖으로 나와서 이어지는 곳에 아이슬란드가 위치해 있고 정확하게는 싱벨리어가 그 경계선에 놓여진 곳이라고 한다.
싱벨리어로 가는 길 주변의 경치는 그야말로 외계행성 같은 느낌이다. 처음 본 형태의 기괴한 산들과 들판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풍경을 만들어 내는데 특히 들판 전체가 나무 없이 이끼와 화산재로만 가득해서 더더욱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싱벨리어로 가는 길이 공사 중인데다가 비포장 도로여서 못 찾을 뻔도 했지만 어찌 어찌해서 겨우 찾아갔다. 이렇게 아이슬란드의 유명 관광지 중에는 접근 도로가 비포장인 경우가 많아서 사륜구동 차가 있어야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 많다.
그 대신 좋은 점은 입장료를 받는 곳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길을 제대로 만들어 놓고 입장료를 받는 게 좋은 지 어떤지 잘 모르겠다. 입장료가 없는 대신 화장실을 돈 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화장실이 비싼 대신 환상적인 경치와 시설을 갖춘 경우가 많았다.
싱벨리어에 도착해서 대륙의 경계선을 찾아보려고 돌아다녀 봤지만 갈라진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어서 어디가 정확한 경계라고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아무데서나 갈라진 곳에 두 다리를 걸치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마도 오늘 그들은 SNS에 ‘한쪽 다리는 유럽, 다른 한쪽은 아메리카’ 뭐 이렇게 올리겠지.. 싱벨리어의 또 하나 볼거리는 갈라진 땅 사이로 솟아오르는 맑은 샘물로 이루어진 계곡이다. 이 곳의 물은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맑다고 하는데 계곡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여서 그 깊이가 3~40 미터가 넘는 곳도 많다고 한다. 예전 티비에서 이 곳을 스쿠버 다이빙으로 다니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싱벨리어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고 트라이앵글의 두 번째 꼭지점인 게이시르로 이동했다. 도착하자마자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르는 이곳은 그야말로 땅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곳이다.
여기 저기 땅 속에서 김이 솟아오르던가 끓는 물이 올라오고 있는 데 그 중에서도 압권은 간헐천이다. 대략 3분 간격으로 60미터까지 하늘 높이 솟구치는데 사람들이 빙 둘러서 기다리고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간헐천을 둘러 싼 사람 고리 중 1/4 정도만 사람들이 없는 곳이 있어서 그쪽에 서 있었더니만 솟구치는 물이 다 그쪽으로 떨어져서 물벼락을 맞았다. 사람들이 서있지 않으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간헐천이 솟아오르는 순간을 찍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폭발하듯이 물이 솟아오르기 때문에 그 순간을 정확히 포착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간격이 3분이라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 솟아오르기 때문에 기다릴 만 했다. 예전엔 간격이 20분 정도였는데 지난번 화산폭발 이후에 간격이 짧아졌다고 한다.
다음은 트라이앵글 중의 마지막인 굴포스 구경이다. 포스는 아이슬란드말로 폭포라는 뜻인데 아이슬란드 구경의 반 정도는 폭포 구경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폭포가 있다. 굴포스는 그 중에서 가장 높은 폭포이다.
예전에 외국 투자자들이 굴포스의 물로 수력발전을 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높은 낙차에서 떨어지는 물보라가 거대한 무지개를 만들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렇게 골든 트라이앵글을 마치고 이제부터는 1번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했다. 진정한 야생의 땅으로 들어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