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문을 여는 생각만 했었어 저녁에
"이제 이거 필요 없어. 너 다시 가져가"
3년 전 여름, 원흥역에서 첫사랑 A에게 심보선의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초>를 돌려주며 던진 말이다.
그게 그 사람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인 걸 알았다면 조금 더 친절하게 말할걸.
지금은 당시의 내가 용서받기 힘들 정도로 서툴렀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때는 삼류 영화의 주인공처럼 자기 연민에 빠져 집에 돌아가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3호선 기차 밖의 풍경은 흔한 일본 애니메이션 TVA 엔딩처럼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때 듣고 있던 노래는 '이스턴 사이드 킥'의 <다소 낮음>.
A와의 작별 후, 내게는 일반적인 대학생 치고는 꽤 많은 일이 일어났다. 큰 수술을 받거나, 스토킹을 당하는 등 짧은 기간 안에 실감하기 힘든 사건들에 내던져졌다. 그래서 이 즈음엔 자기 방어적인 성격이 강했다.
상처는 희미해지고 흉터는 남을 즈음, 나는 A와 닮고 영화를 좋아하는 B와 연락을 주고받던 시기가 있었다. 하루는 그녀와 독립 영화관에서 영화를 기다리는데, 그녀가 <다소 낮음>의 인트로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호감으로 전환되면서 질문을 던졌다.
"그 노래를 좋아하세요?"
"예 뭐... 오기 전에 듣고 왔어요"
그렇게 그녀와의 연애가 시작됐지만, B는 당시의 내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의 자유로움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제는 독후감을 쓰듯 그때를 돌아보고 정리하니 이제는 나도 그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헤어진 이유는 아마 A의 결핍을 B로 채우고자 했던 내 못된 무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7년째 혼자 산다. B가 우리집에 처음 놀러온 날, B와 함께 우리 집에 있던 낡은 TV로 <버닝>을 보았었다. B가 떠나고 혼자 남은 집에 놓인 TV도 버려버렸다. TV에 붙여있는 에너지 소비 효율 '다소 낮음'
"씨발. 삼류 영화도 이렇게 미쟝셴 짜면 욕먹어" 라고 궁시렁대며 대형 폐기물처리 번호를 적고 내던졌다.
시간이 흘러, 나는 A의 모습도 닮고 B의 모습도 닮은 C를 만난다. C는 내가 만나기엔 예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를 힘껏 사랑하기는 쉽지 않았다. C는 딱 내가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사랑했다. C가 문을 두드리면 다 열어주지만, 절대 내가 먼저 문을 열지 않는 방식의 사랑을 했다. 그리고 당시엔 나를 지키기만 하는 수비적인 사랑이 건강한 사랑의 방식인 줄 알았다.
C는 내향적이라 주로 우리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내가 해주는 밥을 같이 먹기도 하고, 같이 게임을 하기도 하고, 같이 누워서 앵무새처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그리고 그 어떤 사람보다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하루는 C와 동네 코인 노래방을 갔던 적이 있다. 내향적인 C가 내 앞에서 처음 부른 노래는 <다소 낮음>이었다. 맑은 목소리에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가끔 C와 만나지 않을 때 C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1년이 지나면서 점점 C가 문을 여는 횟수가 줄었다. 평범한 연애가 거쳐야 할 권태를 이기지 못한 것인지, 누가 먼저 지친 건지도 모른 채, 정신을 차려보니 나와 C는 이별했다. 나는 집에서 지난 연인의 흔적을 정리하고, 친구들을 불러 간단히 회포를 풀고,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는 길에 '1,000원에 3곡' 코인 노래방에 들러서 <다소 낮음>을 3번 불렀다. 싸구려 뮤비가 화면에 나오면서 가사가 흐른다. 소름 끼치도록 평범한 이별의 과정을 처리했다. 그리고 어두운 집에 도착한다. 암막커튼이 무섭게 나를 내려보고 있다. 암막 커튼을 마주하면서 흥얼거린다.
'누가 문을 여는 생각만 했었어 저녁에'
다소 낮음의 영어 제목은 'Inefficient Man'이다. 누군가에게 보통 이상의 사랑을 받아야 문을 열 수 있는 비효율적인 사람. 이제는 나는 좀 더 효율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아니, 내가 문을 여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