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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그루 Dec 05. 2023

미결에 관하여

미결이거나 미결에 대해 다룬 작품들

"만약에 빌리 코건이 3집 내고 죽었으면, 커트 코베인을 뛰어넘었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말이 심한 거 아니냐."


"스매싱 펌킨스가 아저씨들 추억팔이로밖에 남지 않아서 화가 나는 걸. 최근 나온 앨범은 심지어 '열심히 만들었네...'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 어떻게 3집 만든 인간이 저렇게 된 거지? 난 솔직히 커트 코베인은 일찍 죽었기 때문에 고평가 받았다고 생각해. 빌리 코건이야 말로 90년대를 대표하는 뮤지션인데 말이야"


'죽음'이라는 미결이 없었다면, 그 사람과 작품이 아직도 칭송받을 수 있었을까? 사랑도 그렇다. <건축학개론>처럼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미련이 더 큰 법인걸. 사람이라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상상이 생기기 마련이다. 올드보이의 대사처럼 나는 이러한 '미결'에 대한 상상 때문에 종종 비겁해지기도 한다. 오늘은 미결과 관련된 여러 것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여담이지만 죽음이라는 완결적인 속성을 띄는 것이 예술 작품에선 미결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신비하다.)


0. 헌터x헌터 vs 베르세르크

헌터x헌터가 명작으로 칭송받는 것은 뛰어난 작품성도 있겠지만, 나는 "완결이 뒤지게 안 나서"라고 생각한다. 연재가 이어지지 않는 만큼, 계속해서 전 에피소드를 돌아보는 사람이 생길 것이며 이는 2차 콘텐츠로 재생산될 수 있는 큰 원동력이 된다. 또한 독자들로 하여금 끝없이 상상하게 하는 힘도, 연재진행이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국내 유사한 예시로는 덴마와 격기 3반이 있다...


<베르세르크>도 완결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가가 21년도에 사망하며 독자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는데, 당시에 만화 관련 커뮤니티에서 명작으로 추천이 많이 되었던 기억이 있다.


1. 에반게리온 TVA

오메~데토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으로 이야기의 끝을 마무리짓긴 했지만, TVA와 극장판이 분류되어 있는 탓에 에반게리온 TVA는 그 특유의 잔여감이 있다. 이카리 신지와 파일럿들의 내면 심리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신화적 묘사뿐 아니라 리얼리즘적이고 한정된 예산 때문에 나온 창의적 연출은 이미 <에반게리온>을 명작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2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현역 작품들 못지않게 회자되는 것은 TVA의 미결에 가까운 완결 때문일 것이다.  


2. 헤어질 결심

당신의 미결로 남겠어요..

'미결'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헤어질 결심>이 등장하리라고 예상한 독자들이 정말 많을 것이라 예상한다. 작중 송서래가 해준의 영원한 사랑으로 남고자 선택한 행동은 죽음으로써 해준의 미결로 남는 것이다. 당신도 해당될진 모르겠지만, 우리의 일상에서도 그럴 것이다. 미결로밖에 남을 수 없는 사람에 대한 미련이 다른 사람에 비해 클 것이다. 연애 후에 헤어진 사람보단, 만나보기도 전에 훌쩍 떠난 사람이 때론 더 기억에 짙게 남을 때가 있다. 송서래는 '상상과 집착'이라는 영원으로 귀결될 수 있도록 '미결'을 택한 것이다. '미결'에 대해 많은 생각을 남게 하는 작품이다.


3. H2

"하지만 미안해 네 넓은 가슴에 묻혀 다른 누구를 떠올렸었어~" 델리스파이스의 <고백> 가사가 만화 <H2>를 모티프로 두고 쓰인 것은 대부분의 록 리스너들이라면 알고 있는 사실이다. H2는 야구를 소재로 4명의 등장인물의 애정 관계를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이 명작으로 남은 이유는 작중 메인 주인공 히로와 히카리의 사랑이 미결로 남았기 때문이다. 미결로 남기까지의 감정선과 심리묘사가 그 어떤 작품보다 섬세하고 빼어나다.  <고백>의 후렴구 가사는 전반부와 후반부가 다르다. 후반부에는 '떠올랐었어 그 사람이'로 가사가 바뀌는데, 이는 등장인물의 심리를 대변하는 부분이다. 능동적으로 누군가를 생각하다가, 피동적으로 누군가 떠올려지는 그 순간. 그만큼 사랑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찾아오는 미결의 아픔을 다룬 작품.


4. 원스

그럼 미결은 아프기만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따뜻하게 말해주는 존 카니 감독의 <원스>. 아마 Falling Slowly는 들어본 사람은 꽤 있겠지만 이 영화를 직접 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원스>는 클리셰에 가까울 정도의 플롯을 가지고 있다. 음악을 통해 두 남녀가 만나 서로를 치유하고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원스>가 명작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음악과 촬영 등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들의 사랑이 '미결'로 남았기 때문이다. '밀루유 떼베'라고 말했지만, 떠나갈 수밖에 없던 여자의 마음. 떠나는 여자를 위해 피아노 한 대를 선물하고 자신의 길을 걷는 남자. 이 투박한 소재로도 미결의 아름다움에 대해 눈물을 흘리게 하는 따뜻한 작품이다.


마치며

미결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스 로마신화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바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이다. 오르페우스는 하데스와의 약속을 실수로 어겨 아내 에우리디케를 지옥에 두고 온다. 오르페우스는 사랑의 상실을 이겨내지 못한다. 흥미로운 점은, 오르페우스는 아내를 제외한 모든 여성에게 무관심해 오히려 여성들의 애정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이를 끝까지 받아주지 않자 찢겨 죽였다곤 하지만. 여하튼 미결에 관한 이야기는 이때부터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심술궂은 말이지만 누군가에게 오래 기억되고 싶다면, 가끔은 미결로 남아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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