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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하루 Feb 04. 2023

08_눈물 흐르지 않을 거야

앞으로가 아쉽지 않은 사람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려는 그 어중간한 계절. 재작년 일요일이었다. 아쉽기만 한 휴일의 달콤함을 마음껏 느끼고 싶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얼마 남지 않은 주말이 아쉬워 카페로 몸을 움직였고, 오후 내리 책을 읽었다. 일요일 오후 5시 35분. 그날도 여느 날과 같았다. 계절과 같이 애매한 시간이었다.


(지잉) 카드 광고거나 지금 당장 답하지 않아도 되는 연락이라 생각했다. 슬슬 구진한 배에 카페를 나가볼까 하던 차였다. 몇 번 더 진동이 울렸다. '아. 광고는 아닌가 보다.' 싶은 마음에 아이폰 알림 센터에 온 카톡 메시지를 30분이 넘어서야 확인했다. '2명이나 연락을 했네. 웬일이지?' 고등학교 동창들의 연락이었다. 당황스런마음이 컸다. 한 명은 얼마 전부터 드문드문하게라도 다시 연락을 시작한 친구였고, 한 명은 고등학교 졸업 후 단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았던 친구였다. 이상했다. 양 옆으로 당겨지는 하얀 실처럼, 시간의 힘에 끊어지고 있던 미약한 인연들이 동시에 연락을 취해온 것이다.


가장 최근에 온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얼마 전부터 연락을 다시 한 그 친구였다.


"우린 내일 출근해야 해서 30분만 있다 왔어. 애들 많이 왔더라."


뭔 종잡을 수 없는 말일까. 나도 모르게 기억나지 않은 약속을 한 걸까. 아님 잘못 보냈나? 카카오톡 대화창의 숫자 1을 지우고 싶지 않은 마음에 휴대폰 전면을 살짝 아래로 눌러 이전 메시지를 미리 보기 했다.


[부고]

OOO 별세

빈소: **장례식장

발인: **월 **일 **시 **분

주소: **시 **구 **로, **병원



"보통의 하루(필자이름), OO이 기억해?"

"소식 알고 있어?"

"우리는 오후에 같이 다녀왔는데, 보통의 하루(필자이름) 너는 갈 거야?"


머리가 띵했다. 멍해진 머릿속을 부여잡고, '아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이 돌아가신 건가?' 하며 다시 한번 보자 싶었다.


여러 번 다시 봐도 아니었다. 친구 이름이 떡하니 있었다.


회사생활을 하며 누구인지 얼굴도 모를 동료의 부고소식을 듣곤 했다. 보통 부고의 당사자는 조부모님이었다. 한 번씩 연세가 많으신 부장님이나 본부장님 정도는 되어야 부모님의 부고 소식이 전해 들렸다. 몇백 명이 넘는 규모의 카카오톡 단톡방이나 사내 알림창에서야 보던 내용이었다. 그렇게 자주 접해서 무뎌졌다고 생각한 타인의 부고 소식은 면밀히 말하자면 그들의 가족 부고이었지 본인 것이 아니었다. 특히나 내 친구에게서 나올 소식은 아니라 생각했다. '친구'라기엔 학창 시절 동안 대화도 얼마 없었지만, 일반적으로 이 나이에 다가올 거라 예상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20대 중반의 죽음. 사고일까.


카카오톡을 확인한 지 5분이 지났지만 여즉 어안이 벙벙했다. 다음 친구의 메시지를 확인한다. 한 토시도 다르지 않은 부고 메시지 하나와 시간이 괜찮으면 방문하는 게 어떨지 의향을 묻는 메시지 하나였다. 발인일은 내일이었고, 장례식장은 여기에서 편도로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어느덧 오후 6시. 고민이 되었다. 그래도 이 소식을 전해준 친구들이 고마워 답신을 보냈다. 얘기 전해줘서 고맙다고.


애매한 답신을 보낸 후 내면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내가 가는 게 맞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사실 친구가 '죽었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 친구라서 라기보단 내 또래도 장례식장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렸을 적부터 나와 가족에 대한 죽음은 여러 번 생각해 보았지만 그 외 사람은 고려해보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당황스러운 마음에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시간이 얼마 없으니 빨리 결정을 내려야 했다.


'가야겠다.'


후회로 남길 바에야 다녀와야겠다. 그 친구와 어떤 깊은 인연이 있었다고 굳이 얼굴을 비치는 게 말이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참석했다며 생색내는 것만 같았다. 카페를 떠나 집에 오면서도, 샤워하러 화장실로 들어가 30분 동안 뜨거운 물을 맞으면서도 내내 고민했다. 내가 진짜 친구의 마지막을 잘 보내주기 위해 가려고 하는 것인지 계속 반문했다. 출퇴근 시간에 영향을 주는 것도 문득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한편으로 가증스럽기도 했다. 내 마음이 복잡해지고만 있다는 걸 눈치채고 나선 심플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 마음만 편하게 하자. 계속 안고 가져갈 바에 이기적인 마음으로 보고 가는 게 좋겠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다음엔 행동이 빨라졌다.




가족으로 딸려가는 장례식이 아닌 건 처음이었다. 세배하듯 절하는 무례한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유튜브와 네이버 블로그에서 장례식 예절을 찾아보고 시험 보듯 외웠다. 캐주얼 복장이 대부분인 옷장에서 억지로 검은색을 맞추어 구색을 맞추었다.


삼촌이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이런 걸 찾아볼 필요가 없었다. 어린 중고등학교 아이들에게 일을 시킬 만큼 가족이 적지는 않았다. 크게 슬프지 않았고, 통곡하는 어른들이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져 무서울 뿐이었다. 예상치 못한 죽음이란 게 이렇게 당혹스러운 것인가. 영정사진을 보며 울부짖는 어른들이 이런 마음이었던 것일까. 아니 가족의 죽음은 더 심한 것일까. 손과 발은 바삐 움직이며, 머릿속 생각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보통 누군가 돌아가시어 슬픈 마음이 든다면 이유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리움과 후회. 앞으로는 다신 볼 수 없다는 막역한 그리움과 이전에 잘 대해주지 못했다는 후회. 미안하지만 나는 먼저 간 친구에게 그리움과 후회는 딱히 없었다. 무언가 있다고 하면 '나' 또한 죽음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하는 두려움일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생각만 해왔던 그 행동을 실제로 행한 그 친구가 두려웠다. 장례식장에서 그녀가 어찌 그 길을 간 것인지 듣고 나선 두려운 마음이 더욱 커졌다. 그 당시 그녀에게 엄습한 심적, 육체적 고통이 실제로 나에게 느껴지는 듯했다. 그녀의 죽음을 직접 목도한 이의 하소연과 슬픔을 듣고 있을 때에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동공에 지진이 나는 눈동자와 안타까운 얼굴로 경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 바로 옆자리에 앉은 고등학교 동창은 몇 달 전에 그녀를 직접 만났다며 펑펑 울었고, 막지 못한 본인을 탓하며 가족처럼 가슴 아파했다. 하지만 나는 슬프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였다. 우는 동창을 달래고 있는 또 다른 동창도 울고 있지는 않았다. 나와 같은 마음일까. 아니면 이미 모두 쏟아내기라도 한 걸까. 애도를 위해 자리에 왔지만 그뿐인 내 상태가 퍽 냉소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장례식장에서 그녀와의 추억과 먼저 간 데에 대한 장난스러운 원망을 주고받았다.


1시간가량이 지난 뒤에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먼저 가느냐고 말하다가도 붙잡을 정도로 친하지 않은 그들은 적당한 농담과 함께 나를 보내주었다. 미소 지으며 인사를 하고 바닥에서 일어나 식장 출구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 지하에서 지상 입구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호실을 알리는 그녀의 영정사진이 있었다. 취업을 위해 쓰였을 파란 배경의 증명사진이었다. 나는 뽀샤시하게 예쁜 그 얼굴을 1분 정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런 나름의 방법으로 그녀에 대한 명복을 빌었다. 속으로 읊조렸다. 앞으로 더 행복할 거라고. 고생했다고.




한창 우울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가진단 체크리스트가 무수히 떠돌아다닌 시기가 있었다. 거기엔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냐는 문항이 꼭 있었다. 그 문항을 보고 꽤 놀랐다. 모두가 그 생각을 해본 게 아니라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그리고 문항들 속에는 없었지만, 사실 나에게는 죽음의 대상이 나 말고 한 명 더 있었다. 장난스러운 말이 아닌 진짜 죽음. 딱 2명 있다. 나와 아빠.


나는 어린시절 내내 먼저 간 그녀와 같은 선택을 고민했다. 등하교할 때마다 지나가며 보이는 건물과 구조물, 교통수단은 자살의 수단들로 보였다. 나에게 대입하며 방법을 고민했다. 과연 어떤 방법이 덜 아프고, 남들에게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초등학교 친구에게 들었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어떤 할머니가 옥상에서 떨어지는 와중에 누군가 눈을 마주쳤다는 괴담을. 그 할머니처럼 누군가에게 트라우마를 지우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종종 내가 죽는 것에 대한 억울함을 느끼기도 했다. 나를 인정해 주는 이 없고, 모두가 부정한다면 내가 없어지기를 택하는 게 낫겠다 싶었고, 한편으로는 복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꼭 그게 나여야 하나' 하는 생각이 불쑥 드는 것이다. 이따금씩 아빠의 죽음을 상상했다. 아빠가 죽으면 눈물 흘리지 않고 열심히 음식을 나르는 내 모습이 보였다. 오히려 속으로 다행이다 싶을 것이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아빠는 운전을 하며 조수석에서 우는 엄마에게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산 사람이라며 듣기 싫다 다그쳤다. 나도 아빠가 언제일지 모를 죽음을 맞이할 때 딱 그렇게 생각할 자신이 있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부모를 용서하라. 부모의 얼마남지 않은 날을 후회의 날로 남길 것인가. 영정사진 속 부모를 목도할 때 잘못했다 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고 말한다. 그들은 불효하는 자녀들의 정곡을 찌른 데에 만족하며 본인의 촌철살인 한마디로 하여금 교화될 것이라 착각한다. 물론 그런 이들도 있을 테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중학생 때 막내 여동생에게 나지막이 말했듯. 나는 아빠가 보험금만 남긴 채 죽어도 장례식장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여느 죽음과 같을 것이다. 고등학교 동창과 별반 다르지 않다. 누구에게나 올 죽음이 그에게 온 것이다. 그리움과 후회는 없다. 언제까지도 보지 않아도 문제없을 것이며 과거에 대한 후회는 없다. 끝없는 용서에 화답받지 못한 데에서 오는 울분은 있을 수 있겠다. 먹먹한 마음에 뚫어져라 쳐다볼 수는 있지만 더 이상의 연민은 없다. 그 자리를 떠나면 잊힐 사람이니까. 그러니 부디 누군가 과거의 아픔에 슬퍼하며 말한다면 훈계하기보단 그저 경청해 주시길. 먼저 온 이 먼저 가지 않을 수도, 나중에 온 이 나중에 갈 것이라는 믿음은 생각보다 엉성하며, 모두가 당신만 같지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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