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통의 하루 Jul 08. 2023

제 인생은 여름 할래요

길고 무더운 하루

7월이지만 아직 반이 가지 않았습니다.
일 년이라는 시간을 여름날의 주기로 보면 말이에요.


제습기를 사야 하나 고민 중인 요즘 하는 생각입니다. 날은 무덥고, 비가 오지 않아도 습하기만 한데 마음만은 아직 여름이 아닙니다. 더위를 먹어 현실 부정을 하려드나 하시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정신 나간 얘기는 아닙니다. 매일 하루를 보내는 방법은 제각기 다르죠. 빛나는 미래를 위하여 알뜰히 살펴보내거나 찾지 못하는 의미에 그저 흘려보내기도, 또는 들이닥치는 삶의 변곡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신없이 흘러 보내기도 합니다. 24시간. 꼬박 하루가 모이고 모여 주어지는 삶의 밀도는 모두가 다르지만 이쯤 되면 모두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올해도 반이나 지났네.” 후회든 회환이든 어느덧 이 말을 내뱉을 제철이 되었네요.


며칠 전, 저도 제철을 맞아 한 마디 거들어 주었습니다. 제철은 보통 우리나라 사계절 주기로 찾아옵니다. 좀 더 추려서 말하자면, 대략 4월, 7월, 11월 정도이려나요. 찬기운이 드디어 가시고, 트렌치코트 좀 걸쳐볼까 할라치면 일 년의 삼 분의 일이 지났고, 습하고 무더운 날씨에 발냄새 걱정이 들 무렵에는 일 년의 반이나 흘렀으며, 살에 에이는 찬 바람에 더 이상 코트로 버티긴 어려워 롱패딩을 꺼낼 때면 어쩌다 이번해가 다 갔냐며 한 게 뭐 있냐는 신세한탄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하죠. 비단 저와 제 주변 일만은 아닐 겁니다.


휴대폰 알람과 캘린더에서 보는 세상의 흐름은 어느새 우리 곁을 지나쳤습니다. 우리를 훑고 간 세월의 파도는 젊은 날을 휩쓸어 갔습니다. 그리고 여즉 그 바닷물에 잠겨있지요. 계속해서 흘러가는 중입니다. 찾아오는 파도의 세기는 사람마다, 각자의 시기마다 다릅니다. 눈 시린 겨울 바다의 잔잔하면서도 찰방거리는 작게 조각난 파도가 될 수도, 여름날의 너울성 파도가 될 수도 있죠. 때론 기상청 예보보다 큰 쓰나미로 닥쳐오기도 합니다. ‘흐름’이라는 건 같지만, 각자에게 다른 의미를 주는 ‘시간’이란 건 참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무심하게 지나가다도 엉겁결에 깨달으면 괜스레 무섭기도, 기회로 빛나기도 하니말이에요. 끝끝내 덮쳐올 예견된 미래에 두려움에 떨며 튼튼한 철제 배 한 척 마련하지 못한 나를 자책하다 조그만 나룻배를 만들만한 여력조차 바닥에 흩뿌리기도 합니다.


다른 날과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함의 연속인 오늘은, 마치 복숭아뼈에서부터 종아리 사이 즈음 오는 높이의 졸졸 거리는 시냇물 모양새와 같았습니다. 잔잔함과 평안함, 그리고 때론 지겨움이겠죠. 지금의 안락함을 만끽하고자 최대한 숨죽이며 들리지 않았던 작은 시침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겠습니다. 그간의 해일에 몸과 마음을 추스르면서요. 하지만, 때론 작고 느리게 퍼지는 연속된 수면의 파동 속에 따분함이 쌓이고 쌓이다 못해 손과 발로 물장구를 치며 스스로 만든 평화를 헝클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닥쳐오는 빌딩 높이의 검은 파도를 보며 경외감에 사로잡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파도타기를 시도하거나, 좌절하여 두 손, 두 발 다 들고 운명을 직시하리라 고이 누워있는 이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마다 시간, 세월, 삶을 바라보는 태도는 모두 다릅니다. 심지어 같은 상황에 놓여있다 하더라고도요. 그래서 저는 제 삶을 하절기로 빗대어 보려고 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떠한 사계절이라 하더라도 주어지는 하루의 시간은 같습니다. 24시간. 느리기도 빠르기도 한 하루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내 안팎에 처한 환경에 따라 흘러가는 시간의 체감은 많이 다르겠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같은 24시간에도 쓰임의 질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름과 겨울이 그 극단적인 예시이죠. 여럿 강연자들은 삶을 하루에 빗대며 좌절하는 청장년들을 위로합니다. 이미 너무 늦었다며 포기하려는 이들에게 아직 하루의 낮이 가지 않았다며, 한창의 오후라며 다시 시작할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저는 이 말에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하루가 대체 어느 계절의 하루일까. 나의 하루는 일찍 밝혀져 뒤늦게야 어둑해지는 여름날의 하루일까, 새벽인지 아침인지 헷갈리는 아침과 늦은 오후면 벌써부터 밤처럼 까마득한 어둠이 찾아오는 겨울날의 하루일까.


 그래서 기왕이면 여름을 택했습니다. 시계를 앞당겨 이른 잠에 드는 섬머타임이 따로 없다면, 꽤 이득이겠습니다. 어둠과 하루의 마감을 삶의 마감이라 칭한다면, 나의 끝은 뒤늦게 오며 오랜 기간 희망에 차 있는 삶이 되길 바라면서요. 여름의 정점에 다가서며 점차 낮이 길어지길. 아직 오지 않은 일출이었다면 상식상의 아침 시각보다 좀 더 먼저 찾아오며, 이미 낮이었다면 부디 나도 저녁인 줄 몰랐을 정도로 일몰이 더디게 찾아오길 바랍니다. 일 년의 반절이 지났음을 알리는 달력 속 숫자와 짧아진 옷차림으로 인해 다가오는 저녁의 두려움을 떨치고자 합니다. 내 삶은 여름처럼 흐르기에 낮을 좀 더 붙잡아 두리란 걸 알고 있으니까요. 백야가 오리라 허황된 망상은 하지 않겠지만, 적당히 안심할 수 있겠습니다.


이미 겨울인 줄 알았던 이들에게 여름날의 새벽이었음을 알게 되는 날이 찾아오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 며칠간 비가 내리오다 오늘만큼은 햇볕이 따사로운, 2023년 7월 여느 주말 오후 씀.

매거진의 이전글 29살에 편의점 알바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